보고 배우는 인물사/여성독립운동가

여성독립운동가 곽낙원선생님

윤의사 2019. 4. 6. 17:27

세종문화회관 지하 세종미술관에서 여성독립운동가 전시가 열리고 있다.

그 중 백범 김수선생의 어머니인 곽낙원님은 우리에게 나라에 대해 생각하는 마음을 갖게 한다.

 

곽낙원은 1859년 황해도에서 태어나, 14세에 김순영과 결혼하여 아들 김구 선생을 두었다 .

곽낙원은 가난한 집안 형편 속에서도 외아들인 김구 선생에게 교육에 헌신적으로 힘써 강한 신념과 저항정신을 가르쳤다. 17세에 남편 김순영이 반신불수가 되자 곽낙원은 남편의 병을 고치고자 전국을 돌며 의사를 찾아다녔다.

김구 선생이 치하포 주막에서 우연히 만난 일본군 중위 쓰치다를 찔러 죽인 후,

국모의 원수를 갚으려고 이 왜놈을 죽였노라라는 내용의 글과 함께 해주백운방기동 김창수라는 서명을 남기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김구 선생은 일본군 살해 혐의로 18977월 사형을 언도 받고 같은 해 826일 사형집행이 확정되었으나,

광무황제의 특사로 사형직전에 집행정지령이 내려져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1910년 곽낙원은 일제에 의해 국권이 피탈되고, 남편인 김순영이 세상을 떠나자

바느질과 남의 집 가정부 노릇을 하며 김구 선생을 뒷바라지 하였다.

어렵게 자신을 키워준 어머니를 위해 김구 선생 내외가 어머니의 환갑잔치를 베풀려 했으나,

그녀는 시국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며 이를 거절했다.

그리고 이후에도 자신의 생일에 쓰일 돈을 독립군 무기구입자금으로 돌리며

독립운동가 아들과 함께 나라의 아픔을 함께 극복하고자 했다 .

김구 선생을 따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이동한 곽 여사는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폭발사건으로 독립자금이 들어오자 독립단체에서 안살림을 맡아 자금을 관리했다.

그 당시 어느 독립운동가가 그 돈으로 고기라도 먹고 싶다라고 말하자,

곽낙원은 크게 화를 내며 동료가 피를 흘려가며 벌어온 돈으로 고기를 먹다니! 그런 마음으로 독립투쟁에 나선 것이란 말이야라며 크게 화를 내며 회초리를 들었다고 한다.

이런 일화를 보면 곽낙원 여사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호랑이 할머니였다고 할 수 있다.

곽낙원은 광복을 5년 남겨두고 충칭에서 아들의 손을 부여잡으며

난 먼저 가서 애통하게도 내 눈으로 독립은 못 봐도 꼭 네가 눈으로 봐주길 바란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 공훈을 인정하여 곽낙원에게 199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국가보훈처 설명문 참조)

 

 

 

 

 

백범 김구선생

 

곽낙원선생 동상(인천대공원 백범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