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인물사/여성독립운동가

지청천장군과 딸 여성독립운동가 지복영여사

윤의사 2015. 8. 14. 12:42

이제 내일이면 광복 70주년이다.

일제의 침략과 식민지배로부터 벗어나 대한민국으로 발전하는데 있어 독립운동가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중 한국 광복군 총사령관이었던 지청천장군은 호가 백산(白山)이고, 본명 대형(大亨)이며 일명 이청천(李靑天)이라고도 한다.
1888년 1월 25일 서울 삼청동에 있던 옛집에서 지재선과 경주이씨의 장남으로 출생한 장군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하였다. 3세 되던 해에 활쏘기대회를 구경하고 난 후 활쏘기를 취미로 하여 능숙한 활솜씨를 자랑하니 지씨 가문에 또 장군이 났다고 하였다. 이는 장군의 조상 중에 고려시대 충의군 지용기(池勇奇)명장, 조선시대 충장공 지여해(池汝海)장군, 충성군 지계최(池繼崔)장군 등 훌륭한 장군을 많이 배출했기 대문이다.
8세 때에 일본인에게 30전을 받은 지청천을 어머니가 "자기 힘으로 벌지 않고 얻은 돈은 떳떳지 못하며 더욱이 나라를 침략한 천한 일본인의 돈은 받는 것이 아니다"라고 꾸짖으니, 이때부터 항일의식이 싹텄다고 하겠다.
7촌 삼촌인 지석영 때문에 배재학당에 입학해 황성기독청년회(皇城基督靑年會 : YMCA의 前身)에 참여하면서 민족의식을 쌓아갔다.
1904년 한국무관학교에 입학했으나, 1907년 일제의 한국군대 강제해산을 겪으면서 역량을 키워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관비(官費)로 일본유학을 떠나 육군유년학교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제1차 대전 때에는 청도(靑島) 전투에서 참가하여 실전경험을 쌓았다. 이러한 실전 경험은 이후 독립전쟁을 치르면서 백분 활용할 수 있었으니 일제에게 그대로 갚은 꼴이 되었다.
1919년 일본군을 탈출해 만주 봉천성 유하현에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면서 왜군의 경계를 피하기 위해 어머니 성을 따서 이청천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신흥무관학교 교성대장으로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고, 1920년 서로군정서에 참여하였다.
청산리전투 후 일본군의 대대적인 보복을 피하여 간도 안도현 밀림으로 이동해 서일·김좌진 등과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고, 여단장으로 있었다. 끊임없는 일본군의 공격에 헤이룽장성 자유시로 피했다가 일본군의 사주를 받은 러시아에 포로가 되는 자유시사변이 일어났다.
러시아의 포로에서 탈출한 장군은 동삼성으로 돌아와 국민대표회의 등을 통해 독립군을 강화하다가, 1924년 정의부를 조직하여 의용군 총사령관이 되어 국내진격작전을 전개하여 일본군과 경찰을 공격하였다.
독자적인 작전의 어려움에 중국과 연합한 한중연합군을 결성하여 김좌진장군과 함께 일본군 반총연대를 기습하여 일본군을 거의 점멸시키고 군용물자 20마차를 얻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한중연합군을 지도하기도 했으나. 중국공산당의 방해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장군은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 일본을 무찌르기 위해 군대가 필요하자 1940년 임시정부 직속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여 총사령관으로 대일전쟁에 참여하였다.

광복 후 개인 자격으로 귀국한 장군은 제헌국회의원, 정부수립 후 초대 무임소장관을 역임하고, 제2대 국회의원, 민주국민당 최고위원을 지냈다.

우연이나 행운이 아닌 독립에의 열망으로 이름없이 떠난 수많은 선열들의 투쟁과 희생으로 얻은 광복, 지청천장군은 일제에 대한 투쟁을 쉬지 않았고 바로 그 투쟁의 선두요 최선선에서 민족의 발걸음을 재촉해 왔다.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섰으나 혼란이 계속되자 청년이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고 생각한 장군은 전국적으로 대동청년단을 결성하고, 조국재건에 힘쓰다가 1957년 1월 15일 향년 70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아들 지달수와 그의 딸 지복영도 독립운동가이다.

지청천(池靑天)장군의 따님 지복영(池復榮) 여사는 지청천 장군에 관한 다음과 같은 일화를 전해준다.

장군이 1919년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의 교관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도열한 학생들을 일일이 점검하던 장군은 한 학생이 군복의 단추를 잠그지 않은 것을 발견하였다. 장군은 곧 그 이유를 물었다. 당황한 학생은 “단추를 잊어버렸습니다”고 대답했다. 군복을 살펴본 장군은 단추가 떨어져 없는 것을 발견하였다. 장군은 “잊은 것이 아니고 잃어버렸군”하며 그 학생을 호되게 질책했다. “제군은 잊어버렸다와 잃어버렸다의 구분도 제대로 못하는가. 모름지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군인은 생각이 바로 되어야 하고 바른 생각은 바른 언어에서 나온다. 조국의 말도 제대로 모르는 군인이 어떻게 조국을 찾겠는가” 당장 학교를 자퇴하라고 명령하는 장군 앞에서 그 학생은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할 기회를 달라고 여러차례 간청한 끝에 겨우 그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유, 무명의 선열들을 잊지말아야 하겠다.

 

 

지청천장군 흉상

 

 

지청천장군 일기

 

 

한국광복군의 모습

 

 

여자광복군이자 지청천장군의 딸 지복영여사

 

 

지복영여사 회고록

 

 

한국광복군이 쓰던 태극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