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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대사

윤의사 2018. 12. 15. 10:06

조선 선조 때 고승이자 승병장

서산대사의 제자이며,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켜 전쟁에 참여해 평양성을 되찾는데 큰 공을 세웠다.

전쟁이 끝난 뒤 국왕의 부탁으로 일본에 건너가 강화를 맺고 조선인 포로 3500여 명을 데리고 귀국하였다.

저서로는 문집인 <사명대사집>, <분충서난록> 등이 있다.

이름은 응규, 호는 사명당 또는 송운, 법명은 유정이다.

    

사명대사는 어려서 부모를 여읜 뒤 김천에 있는 직지사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그곳에서 신묵을 스승으로 모시고 배움에 힘써 열여덟 살에 승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직지사의 주지를 지낸 데 이어 선종 사찰인 봉운사 주지를 맡게 되었다. 하지만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에 있던 서산대사를 찾아가 배움을 구했다. 그 뒤 이름난 산들을 두루 돌며 불도를 닦는 데 힘썼다.

 

승려들을 이끌고 나가 왜구를 물리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명대사는 나라를 구하라는 서산대사의 글을 받고 승병을 모아 서산대사와 합류했다. 그리고 승병들을 이끌고 명나라 군사를 도와 평양성을 되찾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도한 서울 근교에서도 일본군을 물리치는 등 여러 차례 큰 공을 세웠다.

한편 사명대사는 4차례에 걸쳐 적진에 들어가 왜장 가토와 회담을 나누며 적군의 상황을 살폈다. 특히 2차 회담을 마친 뒤에는 임금에게 글을 올려 백성을 지키고 일본군을 쳐부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전하였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사명대사는 나라의 국방을 튼튼히 하는 데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남한산성을 비롯해 많은 산성을 새로 쌓고, 무기를 만들고, 군량미를 모으는 일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특히 일본군의 조총을 연구해 화약 제조법과 조총 사용법을 병사들이 배울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철저한 준비에 힘입어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 다시 한 번 왜군을 몰아낼 수 있었다.

 

일본과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다

정유재란이 끝난 뒤 조정에서는 일본과 더 이상 싸우지 않고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기를 바랐다. 사명대사는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8개월 동안 두 나라의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 강화를 맺고 잡혀갔던 3500여 명의 백성들을 데려올 수 있었다. 사명대사가 두 나라의 관계를 다시 열고 기틀을 다진 결과, 3년 뒤부터는 외교 사절인 조선 통신사가 우리 문화를 전해주러 가기도 하는 등 두 나라의 관계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

   

Tip) 땀 흘리는 표충비

경상남도 밀양시에 있는 표충비는 사명대사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사명대사비로도 불린다. 이 비석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나라에 큰 우환이 생길 때마다 비석 표면에 땀방울이 맺혔기 때문이다. 가가운 예로 1994년에 성수대교 붕괴 사고가 나기 전에도, 그 다음 해 삼풍백화점 불괴 사고가 나기 바로 전에도 표충비는 땀을 흘렸다고 한다. 학자들은 이 땀이 비석 내부와 바깥 공기의 온도 차가 5도 이상 나면서 생기는 물방울일 뿐이며, 진짜 땀처럼 소금기가 있는 것은 비석에 섞여있는 물질 대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래도 여전히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는 부분이 많아, 어떤 사람들은 나라를 사랑하고 걱정하는 사명대사의 마음이 통하여 일어난 자연 현상이라고 믿고 있다.


사명대사 초상화



해남 대흥사에도 사명대사의 사당인 표충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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