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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

윤의사 2018. 12. 1. 19:18

조선 세종 때 명제상

세종대왕을 도와 나라의 기틀을 튼튼하게 다진, 조선 역사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명재상으로 일컬어진다.

마음이 맑고 깨끗하여 평생 재물을 탐하지 않았던 청백리로도 이름이 높았다.

그는 시와 문장에 뛰어났으며, 저서로는 <방촌집>이 있다.

처음 이름은 수로, 자는 구부, 시호는 익성공이다.

 

황희는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주위 어른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고, 밤낮으로 쉬지 않고 유교 경전과 <사기>를 읽을 만큼 학문을 좋아하였다. 황희는 과거에 별 뜻을 두지 않았으나, 부모님의 권유로 시험을 보아 성균관 학록이 되었다.

하지만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황희는 고려 충신들이 모여 사는 두문동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뒤 백성들을 걱정하는 두문동 선비들의 충고와 태조의 간청을 받아들여 관직 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그러나 태종이 세자인 양녕대군을 자리에서 내쫓고 충녕대군(뒤의 세종)을 세자로 삼자, 이에 반대하다 노여움을 사서 귀양을 가기도 하였다.

황희는 세종대왕의 변함없는 신임으로 다시 벼슬에 나와 18년간 영의정을 지냈다.

 

조선의 기틀을 다지다

황희는 관직 생활을 하며 법대로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펴는 것을 우선으로 하였다. 그래서 <경제육전>을 펴내 법질서를 바로 잡고, 예법을 조선에 맞게 고쳤다.

또한 집현전을 중심으로 문물을 발전시키고, 국방을 튼튼히 하는 등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나아가 백성들을 위해 농사법과 곡식 종자를 개량하고, 추운 겨울에 옷을 넉넉히 지어 입도록 뽕나무를 많이 심고, 관리의 수를 줄여 세금을 줄일 것을 제안했다.

 

청백리의 대명사로 온 국민의 존경을 받다

황희는 오랫동안 영의정을 비롯한 높은 벼슬을 지냈지만, 결코 재물을 탐하지 않아 언제나 가난하였다. 게다가 어려운 이웃들을 돕기 위해 발벗고 나섰는데, 흉년으로 굶주리던 강원도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봉급을 다 털어 주기도 하였다.

덕분에 그는 비가 샐 정도로 허름한 집에서 바닥에 멍석을 깔고 살았으며, 막내딸이 결혼할 때는 혼수를 마련하지 못할 만큼 재산이 없었다고 한다.

 

Tip) 황희와 인간 평등 사상

조선은 신분의 차별이 엄격하던 사회였다. 하지만 황희는 장영실같은 노비 출신도 재주와 능력이 있으면 관리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집에서 부리던 총명한 어린 종에게 출세의 기회를 남몰래 주었던 것은 인간 평등 사상의 실천이라 하겠다. 또 황희는 관청의 여자 노비에게 100일간의 출산 휴가를 주는 것을 법으로 정하였다.

황희는 우리나라 백성뿐만 아니라 외국 사람들에게도 선정을 베풀었다. 그래서 도망해 온 일본인 26명을 모든 관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리 땅에서 살게 하였고, 파도를 피해 우리 쪽 항구에 배를 정박시킨 일본인들에게 쌀을 보내주기도 하였다. 또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여진족의 부녀자와 어린 아이를 죽이고 물건을 빼앗은 병사들을 처벌하였다.



황희정승


황희정승 영당


황희정승 동상


반구정


앙지대, 반구정이 원래 위치해있던 자리에 1915년 반구정을 옮겨지으면서

황희정승의 유덕을 우러르는 마음을 담아 육각정을 짓고 앙지대라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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