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문화유산/조선 왕릉

조선 왕릉 정릉

윤의사 2018. 10. 7. 17:35

정릉-신덕왕후 강씨

 

상산부원군 강윤성의 딸로 태어나 20살 연상인 이성계와 정략결혼을 하였다.

이성계가 강씨와 처음 만난 일화는 고려 태조와 장화왕후 유씨의 일화와 같다. 호랑이 사냥을 하던 이성계가 목이 말라 우물을 찾으니 여인이 있었다. 이성계가 그 여인에게 물을 청하자, 여인은 바가지에 물을 뜨고나서 버들잎 한 줌을 물 위에 띄워주었다. 이를 이상히 여긴 이성게가 “이 무슨 고약한 짓이냐?”며 소리치자, 여인은 “목마름이 심할 때 갑자기 찬물을 마시면 배탈이 납니다. 그래서 버들잎을 잎으로 불며 천천히 드시라고 했습니다.”라는 말에 이성계는 감탄을 하였다. 이때 강씨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고 한다.

신덕왕후는 이방원이 정몽주를 죽인 것을 탓하는 이성계에게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데 걸림돌은 제거해야 한다면서 무마시켰다.

1392년 8월 25일에 조선이 개국되면서 조선의 첫 왕비가 되어 현비(顯妃)에 봉해졌다.

강씨는 정도전과 함께 한씨 소생의 아들을 제치고 방석을 세자로 삼도록 하였다. 이성계도 이에 따랐다. 그러나 자신의 아들이 왕위를 잇기 전인 1396년 9월 15일에 세상을 떠났다. 정동에 묘를 만들고 흥천사를 지어 원찰로 삼았다.

신덕왕후가 죽고 난 뒤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강씨 소생의 왕자들을 모두 제거하고, 경순공주는 비구니가 되었다.

이방원은 왕이 된 후에 정동에 두었던 신덕왕후의 능 정릉(貞陵)을 경기도 양주 지역이던 현 위치(서울 성북구)로 이장했고, 묘의 봉분을 완전히 깎아 무덤의 흔적을 남기지 말도록 명했으며, 정자각은 헐어버린 뒤 1410년 광통교가 홍수에 무너지자 능의 정자각 석물을 광통교를 보수하는 데 사용하게 하여 온 백성이 이것을 밟고 지나가도록 했다. 강씨의 묘소를 이전할 때 많은 비가 쏟아졌으며 하늘에서는 울음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기록으로 전해져오다가 청계천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병풍석이 발견되면서 알려졌다. 워낙 숨겨진 장소인 정릉이기에 세상에 알려진 것은 172년만인 1581년(선조 14년)에 덕원에 사는 강순일이 임금이 행차하는 수레 앞에 나아가 격쟁을 한 결과였다.

 

 

 

고려 후기의 영향을 받은 장명등과 고석(북석)이 두 개인 것이 특징이다.

 

 

묘비명

 

 

신덕왕후의 원찰인 흥천사 표지석

 

 

다음의 사진은 친구 김종수님의 밴드에서 포스팅한 것입니다.

병풍석의 모습이다.

 

 

 

 

 

 

 

 

 

난간석이 다리의 안전대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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