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문무왕 김법민은 삼국을 통일한 영주이다.
그는 백성의 삶을 편안케 했고 삼한을 안정시켰다.
왕은 왕궁 방비를 위해 장엄한 성곽을 짓고자 했는데
어느 날 의상대사가 왕에게 간하였다.
"왕이 바른 정치를 하면 비록 잡풀로 성을 쌓았다고
해도 백성이 감히 넘보지 않고 재난을 깨끗히 하며
복을 받을 것이요. 만약 왕이 정치를 바르게 하지
않으면 비록 큰 성을 쌓았다고 해도 재앙이 해소되지
않을 것입니다.
왕이 즉시 축성을 그만두었다.(삼국유사 기이편)
56세에 왕이 돌아갈 때 다음과 같은 유조를 남겼다.
"과인은 혼란의 시대를 당하여 강토를 안정시키고 조종을 위로하고 부자의 숙원을 갚았으며 병기를 녹이어 농구를 만들고 부세와 요역을 덜어 민생을 편안케 하였다. 이제 죽음에 이르렀음에 옛날 일세를
풍미했던 영주들도 마침내 한 줌 흙이 되어 초동과 목동이 그 무덤 위에서 노래하고 여우와 토끼가 무덤의 구멍을 뚫는 지경이니 분묘란 것은 한갓 재물만 허비
하고 후세의 비평만 남길 뿐이니 내가 죽으면 서역식
으로 화장할 것이며 장례는 검소하게 치르고 백성의
과세는 헤아려 폐하고 율령격식이 불편한 것이 있으면
개폐하라"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하)
한편 왕은 자신의 시신을 화장하여 그 뼈를 동해에 뿌려달라고 하고 죽어 동해의 용이 되어 왜구의 침입을 막겠다고 유언했다.(삼국유사 만파식적조)
아들 신문왕은 부왕의 유언대로 시신을 화장하여 동해에 뿌렸으니 그것이 지금의 대왕암이다.
또한 부왕이 이루지 못한 사찰을 완성하여 이름을
부왕의 은혜에 감읍한다는 의미로 <감은사>라 했다.
삼국유사 기록에 의하면 감은사 금당 섬돌 밑 동쪽에 구멍을 내어 동해의 호국용인 문무왕이 구멍을 통해 금당에 들어와 휴식을 취하게 했다 한다.
감은사는 일제강점기만 해도 민가들이 들어와 절터는
황폐해졌다. 1959년 10월 국립박물관에서 시굴조사를
실시하였고 12월 탑을 해체수리하였는데 3층 탑신석
에서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어 수습하였다. 그 후 20년
후 1979년과 1980년에 전면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발굴조사 결과 금당건물 기둥을 받치는 초석이 H자형
보를 거친 형태로 발견되었고 장대석을 깐 형태의 하부
공간이 있었으며 이 특수기단 동쪽으로 구멍이 있었던 흔적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이 기록에 보이는 용혈이었다.
신화가 역사적 사실로 밝혀진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은혜를 생각하여 절 이름을 감은사로
짓고 금당 기둥 밑에 특수기단과 구멍을 내어 용으로
화한 아버지가 법당 안으로 들어와 법문을 들으면서
편히 쉬어가길 바랬다. 아버지는 나라를 위해 호국용이
되길 원했고 아들은 그런 아버지 마음을 절을 지어
위로하고자 했다. 신라시대 충과 효의 산물, 감은사.
<사진은 본인이 촬영한 것입니다.>
감은사지 전경
감은사지 동탑과 서탑
용이 된 문무왕이 드나들수 있도록 만든 금당 바닥의 모습
문무왕릉, 대왕암
'우리역사문화사전 > 김종수의 역사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세히 들여다 본 익산 미륵사지 석탑 (0) | 2018.06.27 |
---|---|
백자의 가격 (0) | 2018.06.22 |
잉카의 공중도시 마추픽추 가는 길 (0) | 2018.01.10 |
마추피추를 찾아서 (0) | 2018.01.07 |
고개를 숙이면 부딪히는 법이 없습니다 (0) | 2017.12.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