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교의 nh홈쇼핑 건물에 나폴레옹 갤러리가 있다.
하림에서 운영 중이다.
대선이 2일 전이다.
어지러운 대한민국호를 이끌 중요한 선거이다.
지금 나폴레옹이 생각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알프스를 넘을 때의 나폴레옹 모습
나폴레옹이 원정을 다닐 때 사용한 은잔
덴마크 프레드릭6세가 나폴레옹에게 수여한 덴마크 훈장
부테의 명품 도검
나폴레옹은 1769년 8월 15일 코르시카섬의 아야키오에서 이탈리아계 소지주인 아버지 샤를과 어머니 레티치아 라모리사이에서 태어났다. 코르시카섬은 그가 태어나기 15개월전에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식민지인으로 어렸을 때부터 프랑스를 이기기 위한 전쟁놀이를 좋아하였고, 칼․대포같은 장난감을 좋아하였다. 또한 어렸을 때는 남다른 고집과 집념이 있어서 무지개를 쫓아가기까지 하였다.
나폴레옹을 아끼던 그의 아버지는 아들을 위하여 프랑스에 가서 공부할 수 있게 뒷받침을 아끼지 않았다. 10세되던 해에 파리의 교외에 있는 유년군학교에 입학하였다. 학교의 정문으로 들어가는 나폴레옹을 향하여 아버지는
“이 곳은 귀족들이 자식을 장교로 키우기 위해 보내는 학교란다. 너는 프랑스인에게 절대로 져서는 안되며, 장래에 훌륭한 군인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기 바란다.”
“잘 알겠습니다. 아버지.”
정문을 들어서며 나폴레옹은 굳게 결심하였다.
‘이곳에서 열심히 공부하여 코르시카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훌륭한 장교가 될 것이다’
그리하여 귀족의 자제들인 다른 학생들이 호화롭게 다니며 공부에 게을리할 때에 나폴레옹은 끝없이 참고 공부했고, “코르시카의 촌뜨기”라고 놀림을 당해도 나폴레옹은 개의치 않으며 오직 공부에만 매달렸다. 그 결과 남들이 6년 해야 할 공부를 4년 반만에 끝낸 나폴레옹은 만 16세 되던 해인 1785년에 프랑스의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프랑스의 포병 소위가 되었다. 군에 간 지 4년만에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났다. 나폴레옹은 자코뱅당의 일원이 되어 급진적인 노선을 걸었다. 그러나 혁명의 소용돌이속에 뛰어들지는 않았다. 그는 조국의 독립을 꿈꾸고 있었기 때문에 휴가를 얻어 코르시카로 가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그러나 고향에서는 그를 반겨주지 않았다. 영국의 지원을 받으며 독립을 꾀하는 코르시카인들에게 그는 프랑스지지자로 낙인 찍혔기 때문이었다. 다시 프랑스로 되돌아 온 나폴레옹은 로베스 피에르의 동생인 오귀스탕에게 접근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때 절대왕조의 붕괴를 두려워 한 다른 유럽국가들이 프랑스를 공격하자, 결국 나폴레옹도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이름을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여 툴롱의 포위․공격작전에 참여하였다. 1793년에 왕당파의 반혁명 음모로 툴롱항에 들어온 영국 함대를 포병대에 소속된 나폴레옹이 용감하게 싸워 격파했다. 이를 계기로 나폴레옹은 비로소 장군의 이름을 얻게 되었고, 일약 국민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장군으로서 명성을 얻은 나폴레옹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자네는 로베스피에르에게 협력하였으니 즉시 파면이다.”
프랑스대혁명 기간중에 공포정치로 악명이 높았던 로베스피에르가 쫓겨나면서 군복을 벗게된 것이다. 나폴레옹은 자포자기하며 혁명의 진행과정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로베스피에르의 뒤를 이은 5명의 총재정부는 혼란만을 가져왔다. 혼란에 빠진 상황을 틈타 왕당파 무리가 쿠테타를 일으켰고, 의회는 당황하였다.
“누군가 이 쿠테타를 막아야 하는데.”
의회는 발만 동동 굴렀다.
“지난번에 툴롱에서 영국함대를 격파한 나폴레옹이 어떻습니까?”
“나폴레옹,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빨리 그를 찾아 지휘관으로 임명합시다.”
“이의있습니까?”
의회에서 이의가 없자, 나폴레옹이 즉각 진압부대의 지휘관으로 발탁되었다. 그는 수적으로 많은 왕당파의 반란군을 단번에 진압했다. 그리하여 왕당파의 꿈은 산산히 깨져버렸고 나폴레옹은 곧바로 정부군의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듬해인 1796년 3월 나폴레옹은 6세 연상의 조세핀과 결혼을 하였다. 결혼식을 마치고 이틀 뒤에, 그의 임무는 이탈리아방면으로 세력을 넓히는 오스트리아군을 견제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의 뛰어난 전략과 지도력을 보여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는 작전을 생각하였다.
“이탈리아는 언덕과 평야가 경사를 이루고 있으니, 이것을 이용하면 대승할 수 있어.”
이같은 작전의 성공으로 이탈리아를 정복하고 막대한 금과 은을 약탈품으로 가져왔으며, 승리의 여세를 몰아 네덜란드까지 점령하였다. 원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나폴레옹을 프랑스 국민들은 열광적으로 환영하였다.
“프랑스는 오직 그대의 힘에 의해서만 자유로워질 것이다.”
“나폴레옹장군 만세”
이제 나폴레옹은 프랑스에 적대적인 영국 등을 공격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영국을 골탕먹이기 위해 나폴레옹은 영국의 식민지였던 이집트를 공격하였다. 이 싸움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으나, 영국의 넬슨제독에게 프랑스 해군이 패하는 바람에 결국 이집트를 포기한 채 귀국하였다. 귀국후에 동료인 시에스와 의논하였다.
“여보게, 지금 정부는 5명의 총재가 정치를 함으로써 혼란이 더욱 심해지고 있어. 지금 정부로는 프랑스의 미래가 불안해.”
“자신있나? 나도 사실 자네만 좋다면 그럴 생각이었네.”
두 사람은 의견의 일치를 보고 1799년 11월 9일에 군사 쿠테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나폴레옹은 임기 10년의 통령에 임명되었다.
통령이 된 나폴레옹은 늘 주위 사람들에게 말했다.
“우리나라는 유럽 제1의 국가가 되어야 한다.”
유럽 제 1의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다른 국가를 정복해야만 했다. 사냥감을 찾는 나폴레옹은 알프스를 넘어 오스트리아를 점령하고자 하였다. 그러자 주위의 참모들은 반대하였다.
“통령각하, 알프스산맥은 워낙 험준하여 대군이 넘기가 곤란합니다. 다음 기회로 미루는 것이 어떠한지요?”
“그렇습니다. 특히 알프스산지는 기후 조건도 아주 나쁩니다.”
“여러분, 우리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나의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없습니다.”
결국 알프스 산지를 넘은 나폴레옹은 불가능이 없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대외적으로 정복활동을 하면서 그의 정치 야욕는 끝없어 통령이 된 3년후에 종신 통령이 되었다. 그의 끝없는 야욕은 다시 2년후에 국민투표를 통해서 황제로 등극할 수 있었다. 프랑스에서 황제가 다스리는 제 1제정이 성립된 것이다.
나폴레옹의 불가능이 없다는 말은 결국 그가 유럽 국가에 영국과의 통상을 금한다는 ‘대륙봉쇄령’을 어긴 러시아 원정이 실패로 돌아가고, 1814년 라이프찌히전쟁에서 영국을 중심으로 한 동맹군에게 패배한 후 엘바섬으로 귀양가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1815년 3월 엘바섬을 탈출하여 다시 파리로 돌아와 백일동안 정권을 부여잡은 ‘백일천하’를 이루었다. 나폴레옹에 적대적이었던 영국을 비롯한 오스트리아는 그가 전열을 정비하기도 전에 공격하여 워털루전투를 그의 패배로 이끌었다. 그는 대서양에 외로이 떠있는 세인트 헬레나섬에 유배되었다가 1821년 5월 5일에 5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나폴레옹은 정복전쟁을 일으키면서 프랑스의 혁명정신을 유럽에 고취시켰으며, 더구나 나폴레옹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한 유럽의 많은 국가들이 독립위한 민족주의정신이 일어나는 계기를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