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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

윤의사 2013. 4. 19. 18:18

오늘은 4.19혁명이 일어난 지 53주년이다.

우리나라 민주주의 혁명의 한획을 그은 혁명이다.

4.19혁명의 과정은 이러하다.

 

이승만대통령은 2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국회의 간접선거로 당선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1952년에 ‘발췌 개헌’을 통하여 국민의 직접 선거로 뽑도록 개헌하였다. 2년 후에는 대통령이 4년 연임만 한다는 규정을 초대 대통령은 적용받지 않는다는 개헌안을 억지 춘향으로 통과시킨 ‘사사오입 개헌’이 있었다. 이러한 부정과 부패가 계속되는 가운데 1960년 3월 15일의 정․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 정권은 이승만과 이기붕을 정․부통령 후보로 내세웠다. 한편 야당인 민주당은 조병옥과 장면을 정․부통령 후보로 내세웠다. 그런데 조병옥이 선거가 실시되기 전에 미국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4번째 대통령의 당선을 노리는 이승만의 대통령 경쟁자가 없어졌다. 그러자 자유당 정권은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하여 조직적으로 부정 선거를 감행하였다.

이에 마산에서 3․15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학생과 시민의 시위가 시작되었다. 4월 18일에는 서울에서 고려 대학생들이 궐기하였다. 4월 19일에는 서울 시내의 학생들과 시민들이 대규모의 시위를 계속하였고, 지방의 대도시에서도 시위가 잇달아 일어났다. 이승만 정권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계엄군을 진주시켰으며, 경찰의 발포로 많은 사람이 죽거나 부상당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학생들의 피해가 잇따르자 4월 25일에 교수들까지 시위에 참여하였고, 이승만대통령은 4월26일에 하야 성명을 발표하였고, 자유당 독재 정권도 무너지게 되었다. 이로써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는 민주화가 시작된 듯 하였다.

이승만 정권이 하야한 후에 7월 29일에 민의원과 참의원을 뽑는 총선거에서 정권을 잡은 민주당은 신파와 구파 사이에 격심한 분열과 집권 경쟁을 벌였다. 그리하여 민주당이 분열되어 안정된 기반을 갖추지 못한 채 정국이 불안하였다. 정국의 불안은 사회 불안으로 이어져 각종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이에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일부 군인들이 1961년 5월 16일에 군사 정변을 일으켜 민주당 정권이 무너지고 민주화는 한동안 중단되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2차 대전 후에 독립한 나라 중에서 정치와 경제가 동시에 성공한 유일한 나라이다.

나라를 지키고 민주주의를 바로 세우며, 경제를 일으키기 위해 애쓴

조상들을 위해 모든 국민들은 각자의 소임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리고 절대 국론분열이 있어서는 안된다.

적 앞에서는 한국민이라는 사실을 직시하고 함께 해야만 한다.

나라 잃은 설움보다 국민들에게 정신적, 경제적인 고통이 더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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