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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화, 언제부터 국화가 되었을까?

윤의사 2012. 8. 14. 20:00

모든 국가에는 국화(國花)가 있다. 곧 나라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법으로 정한 일도 없이, 자연스럽게 무궁화가 국화로 굳어졌고,

또 국민들은 이 꽃을 사랑하며 아끼고 있다.

 

일제 침략기에 우리 민족이 나라의 상징으로 무궁화를 깊이 사랑하였다.

이에 무궁화를 뜰에 심는 것을 일본인 관리들은 몹시 단속했고,

무궁화로 한반도 지도를 수놓아 벽에 거는 것은

거의 반역죄를 범한 것처럼 다루었었다.

이러는 사이에 무궁화에 대한 우리 국민의 사랑은 깊어만 갔다.

이 시기에 남궁억 선생은 무궁화묘목을 다량으로 길러

널리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무궁화는 오래 전부터 한반도에 널리 재배되었다.

그래서 예로부터 우리나라를 근역(槿域 혹은 근화지향-槿花地鄕이라고도 함)이라고 일컬었다.

왜냐하면 무궁화가 많기 때문이다.

무궁화에 대한 가장 오랜 기록인 동진(東晋)의 문인 곽복(郭福:276-324)이 쓴 지리서 『산해경(山海經)』에 ‘군자의 나라에 무궁화가 많은데, 아침에 피고 저녁에 지더라.’ 라는 기록에서 알 수 있다.

여기에서의 군자의 나라는 우리나라를 말한다.

 

또 중국의 고전인 『고금기(古金記』에서는

‘군자의 나라에는 지방이 천리인데 무궁화가 많이 피었더라.’

라는 기록도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도 1400여년전인 4세기 중엽에

우리나라에는 가는 곳마다 무궁화가 만발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옛날 사람들은 무궁화를 굉장히 아름답게 보았다.

공자가 애독하던 『시경(詩經)』에 ‘안여순화(顔如舜華)’ 라는 말이 있다.

얼굴이 어찌 예쁜지 마치 무궁화같다는 뜻이다.

무궁화의 아름다움을 가장 짧으면서도 함축성있게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고려 시대에도 무궁화는 많았던 모양이다.

그것은 고려 제 16대왕 예종(1105-1122)은 고려를 ‘근화향(槿花鄕)’ 이라고 한 점으로 추측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 무궁화는 우리 민족의 성격과 비슷하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즉 초여름부터 가을까지 꾸준하게 계속되는 긴 화기(花期)는 줄기차게 이어지고 피고지고, 또 피는 무궁화에서 줄기차게 이어지는 우리나라의 역사와 줄기차고 억센 자강불식(自强不息)의 기상이 엿보인다고 한다.

 

 

이 무궁화는 씨나 꺾꽂이로도, 또 포기나누기로도 쉽게 번식이 가능하며,

토양 선택이 까다롭지 않아서 어디서나 잘 자라므로

일반 백성과 친근한 꽃이다.

여기에 꽃과 씨와 껍질과 뿌리는 모두 소중한 의약재로 쓰이며,

꽃과 잎은 차고, 그리고 껍질의 섬유는 고급 종이의 재료로 쓰이니

아주 실속있는 꽃나무라고 할 수 있다.

 

 

무궁화는 국화로 명문화된 법령이 없지만,

무궁화는 일제강점기에는 은근과 끈기로 일본에 저항하는 우리 민족 독립운동의 상징이었다.

애국가에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라는 후렴구가 생겨나고,

1948년 8월15일 정부 수립 기념식에서 애국가가 국가로 불리며

무궁화도 자연스럽게 나라꽃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므로 무궁화는 우리 민족과 역사를 함께 했던 꽃이기에

자연스럽게 나라꽃(國花)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 국민들 중에는 무궁화꽃에 진딧물이 많아 싫어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우리 조상들은 진딧물이 있는 무궁화꽃을 더욱 사랑하였다.

그래서 무궁화를 농사짓는 땅 가까이 심었다.

왜냐하면 진딧물을 먹기 위하여 무당벌레가 모여들어 진딧물뿐만 아니라

농작물의 병해충까지 잡아먹어 친환경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궁화는 자연스럽게 우리와 가까워졌다고 하겠다.

 

 

분홍색의 무궁화가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완전 개화 시기가 아니어 많이 피지는 않았지만 흰색 무궁화도 아름답기는 마찬가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