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바캉스철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바캉스, 즉 이동 피서를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원래 우리 민족은 정착 민족이므로 무더위를 앉은 채 이겨내는
정적 피서를 해왔다. 그래서 이열치열(以熱治熱)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옛날에는 이동 피서라고 해야 마을 계곡이나 뒷산으로
소풍을 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봄가을에 가족들을 이끌고 대규모로 금강산이나 묘향산 등
명승지로 꽃구경이나 단풍 놀이를 가는 것에 비하면
여름철의 피서 행렬은 별로 크지 않았던 것이다.
고려 명종 때의 학자 이인로(李仁老:1152-1220)의
<탁족부(濯足賦)>를 보면 옛날 조상들의 피서의 멋을 한껏 느낄 수 있다.
나물먹고 배부르니
손으로 배를 문지르고
가냘픈 오사목 제켜 써,
쨍그렁 용죽장 손에 짚고
돌 위에 앉아
두 다리 드러내고 발을 담근다.
한 움큼 물을 입에 머금고
주옥을 뿜어내니
불같은 더위가 지나가네.
먼지 묻은 갓끈 씻어 내고
휘파람 불며 돌아오니
시냇바람 설렁설렁.
여덟 자 대자리에 조각만한 영목침 베고
꿈속에서 흰 갈매기와 희롱하니
좁쌀이야 있거나 말거나.
정적 피서에 필요한 물건들은 부채, 땀받이, 고의적삼 등이다.
물론 일반 백성이 아닌 상류층의 피서 용품들이다.
부채는 중국의 경우 춘추전국시대 이전부터 있었으니,
우리나라에도 일찍부터 전해졌으리라 생각할 수 있다.
이 부채를 고려 초기에 접선(摺扇:접는 부채)으로 개량해
가지고 다니기 편리하게 했다.
그래서 더위가 시작되는 음력 5월 5일 단오에 주는 선물로
제일로 친 것이 바로 단오부채였다.
단오 부채에는 좋은 글귀나 그림을 그려넣어 한껏 멋을 부리기도 하였다.
땀받이는 오늘날 의자나 자동차의 등받이처럼 땀의 흡수를 막아주는 것이다.
의복과 피부사이에 넣어 통풍이 잘 되게 하였다.
고의적삼은 삼으로 만든 것으로 남자들이 입는 홑바지다.
삼으로 만든 홑바지는 까칠한 면이 피부에 닿아
시원한 느낌을 갖게 하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고의적삼에 한산모시를 입고 땀받이를 등에 대고
접선으로 부채질을 하며 피서를 했던 것이다.
또 죽부인이라는 피서 용품도 있었다.
대나무를 결대로 쪼개어 길고 둥글게 엮어 만든 기구로
이를 껴안고 자면 이불과 피부 사이에 틈이 생겨 바람이 들어와 시원하였다.
그 이름을 ‘죽부인’이라고 의인화 했듯이,
아버지가 쓰던 것은 아들이 쓰지 못하는 법도도 있었다.
이 밖에 마을 산야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익모초(益母草)의 즙을 내
그 쓰디쓴 맛을 보며 더위를 식히기도 하였다.
일반 백성들은 낮에는 나무 그늘에서 낮잠을 즐긴다든지,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탓하며 가혹한 더위와 비교하는 등
이야기를 나누며 피서를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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