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에는 급한 일이 있으면 전화나 전신으로 연락을 한다.
어린 아이들부터 할아버지나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휴대폰을 들고 연락을 한다.
그러면 전화나 전신이 없던 옛날에는 봉수를 이용해 급한 소식을 전했다.
봉수는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를 하여 변방의 긴급한 사항을 중앙에 알리는 제도였다.
봉수제도는 삼국시대부터 그 기능을 발휘하였다. 즉 『삼국사기』에 보면 ‘백제 온조왕 10년에 왕이 친히 군대를 거느리고 봉현(烽峴)에서 말갈족을 격파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봉현(烽峴)’이 어디인지는 알 수는 없으나 ‘봉현’은 봉수대가 설치된 언덕이 아닐까 추정할 수 있다.
봉수제도는 고려시대에 더욱 강화되었다.
이민족의 침입이 많았던 고려에서 이들의 침입을 미리 중앙에 알려야 대처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의종 3년(1149)에 서북면 병마사 조진약(曺晉若)의 제의로 실시된 봉수는 이민족의 침입을 막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봉수 제도는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세종 때에 봉수법이 마련되고 성종에 이르러 완비되었다.
평시에는 횃불을 한 개, 적이 나타나면 두 개, 적이 국경에 접근하면 세 개, 국경을 넘어오면 네 개, 접전을 하면 다섯 개를 올리기로 하였다. 기상이 악화되어 봉수로 연락을 하기 힘들 때에는 봉수대 관리 병사가 직접 말을 타고 연락을 하기도 하였다.
변방 국경에서 서울까지 봉수가 도착하는 데에는 열두 시간쯤 걸렸다고 한다.
부산에서 연기로 신호를 보낸 봉수가 성울의 목멱산(오늘날의 남산)에 이르면 날이 어두워져 봉화로 바뀌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봉수가 서울로 올라오는 길은 다섯 군데였는데, 북쪽에서는 함경도와 평안도에서 출발하는 길이 있었고 남쪽에서는 동남, 서남 해안에서 출발하는 길 등이 있었다. 이 길은 전국을 돌아 서울에 이르도록 되어 있었다.
봉수대는 그 지방의 군지휘관이나 수령이 관리하여 매일 보고를 받도록 하였다.
서울에서는 병조(지금의 국방부)가 관리하여 목멱산의 경봉수대(京烽燧臺)를 지켜보면서 왕의 비서기관인 승정원에 매일 아침 보고하였는데, 비상시에는 밤중에라도 보고를 해야 했다.
전국적으로 630개 가량이 설치된 봉수대는 20리~40리 간격으로 주변에서 시야가 확뜨인 산봉우리에 설치하였다.
봉수대는 높이가 3미터 정도이고, 밑면은 사각형으로 널쩍하며 위로 가면서 좁아지고,
불을 때는 아궁이는 밑에 있었다.
조선 성종 5년(1475) 이후 모든 봉수에 반드시 연통(煙筒)을 만들어 바람이 불어도 연기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하였다.
또한 국경 지대에 설치된 연변 봉수대는 높이 7.7미터, 둘레 21미터의 대를 쌓고, 대 주위에 폭 9미터 정도의 공간을 두고 그 바깥에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깊이 3미터, 폭 3미터 정도의 정사각형 참호를 파고, 다시 그 바깥에는 폭 3미터 정도의 지대에 위를 뾰족하게 깎은 나무를 꽂았다. 그러나 내륙 봉수대는 적의 침입 위험이 없었으므로 높은 대와 참호 등을 설치하지 않았다.
봉수대 관리 병사인 봉군(또는 봉졸)은 연대지기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다른 군역에 종사하지 않으며, 오직 망보는 일에만 종사했다.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곳에 근무하는 봉졸은 오늘날 등대지기만큼 외로운 직업이었으며,
불이나 연기가 꺼지면 곤장 백 대를 맞고 유배를 당했고
통신을 게을리하거나 거짓 봉화를 올리면 참형을 당했다.
이들은 연기가 바람이 불어도 흩어지지 않고 곧게 올라가게 하기 위하여 이리나 여우똥을 수집하였다.
이리나 여우는 동물의 뼈까지 먹기 때문에 배설물에 뼈가 나오니 바로 모분(毛糞)이다.
모분을 연기를 짙게 하는 솔잎과 함께 태우면 연기가 곧게 올라갔다고 한다.
백성들은 봉수대의 연기가 매일 하나만 피어오르기를 바라면서 생업에 종사하였다.
남산의 봉수대(휴일이라 사람들이 많아 어려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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