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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죽어 용인이라 했는가?

윤의사 2012. 7. 4. 15:25

왜 죽어 용인이라 했던가?

요즈음 용인은 명당이 많다고 한다. 많은 유명 인사들이 용인에 묘지를 쓰면 후손들이 잘풀린다고 한다. 단적인 예가 김대중대통령이 선친의 묘를 용인으로 이장한 후에 당선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용인이 명당이 된 것은 정몽주의 묘가 생기고 난 이후이다.

포은 정몽주의 묘소는 용인시 모현면 능원리에 있다. 서울에서 이곳을 가려면 올림픽대로 - 분당간 고속화국도를 따라 오리에서 빠져나와 국도에 접어들면 43번 국도로 광주 방면으로 6KM를 가면 포은 정몽주의 묘소가 있다.

그런데 고속화국도가 끝나는 지점부터 포은의 자취는 남아 있다. 고속화 국도의 종점이 죽전이다. ‘죽전(竹田)’은 ‘대나무 밭’을 뜻하는데, 이곳에는 대나무밭이 없다. 포은이 이방원에 의해 죽음을 당했던 선지교에서 대나무가 솟아났다고 하여 ‘선죽교’로 바뀌었다. 바로 대나무는 임금에 대한 충성을 상징하며, 포은의 장례 행렬이 이곳을 지났기에 죽전이라는 지명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죽전을 지나 풍덕천에 이른다. 원래 풍덕천은 ‘풍덕내’였다. 바로 포은의 장례행렬이 이곳을 거쳐 경상도 영천으로 가는 길이었다. 포은의 묘소가 개성의 풍덕에 있다가 이곳을 거쳤다고 하여 ‘풍덕에서 왔다’는 뜻에서 한자의 올‘래(來)’자를 써서 ‘풍덕내(來)’라고 불리다가 ‘내’를 ‘시내’로 잘못 해석하여 풍덕천으로 불리워진 것이다.

포은의 묘는 풍덕천을 거쳐 다시 대지리를 거쳤다. 이 또한 ‘포은과 같은 대충신이 지나간 큰 땅’이라는 의미의 ‘대지(大地)’이다. 이제 포은의 묘소는 점점 가까워진다. 바로 모현면에 있다. 모현면의 원래 이름은 쇄포면이다. 그런데 포은의 장례 행렬이 이곳을 지나는데 갑자기 영정(죽은 사람의 얼굴을 그린 족자)이 바람에 날아가 현재 묘소의 위치에 떨어져 이곳에 안장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충성스럽고 현명한 학자를 사모한다’는 뜻의 ‘모현(慕賢)’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용인은 선비들이 죽어서 묻히기를 바라는 곳으로 변했을 것이며, ‘살아서는 진천이요, 죽어서는 용인’이라는 말도 나왔으리라 추측된다.


서울이 조선의 정도(定都)이면서 대한민국의 심장부가 되면서 내노라 하는 사람들이 서울에서 가까운 용인에 묘를 쓰기 시작하였다. 조광조를 비롯하여 허균, 이일, 오달제, 남구만, 유형원, 체제공, 민영환, 이병철 등 내노라 하는 사람들의 묘가 용인에 있다. 

 

정몽주묘 전경

 

조광조묘 전경

 

채제공묘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