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서민들은 보리를 수확하기 전에 많은 고생을 하였다.
특히 먹을 것이 부족하여 나무뿌리나 소나무의 생껍질을 삶아먹을 정도였다.
그리하여 이 시기를 ‘보릿고개’라고 한다.
보릿고개 시절에는 많은 사람들이 먹지를 못하여 얼굴이 누렇게 변하는 ‘황달’ 증세를 보였다.
보릿고개 시절의 힘겨운 생활을 벗어나게 해준 고마운 농작물이 바로 고구마와 감자이다.
백성들의 식량을 구해준 작물이라고 하여 고구마와 감자를 ‘구황작물(救荒作物)’이라고 한다.
고구마는 조선 21대 임금인 영조 39년(1763) 일본(日本)에 통신사(通信使)로 다녀올 때 쓰시마섬에서 고구마 가꾸는 법과 저장법 등을 배워가지고 우리나라에서 맨 처음으로 고구마를 들여왔다.
감자의 원산지는 남아메리카 안데스산맥의 고원지대이다. 500년경부터 안데스산맥 중남부 고지의 원주민에 의해 감자가 재배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측되며, 16세기 후반(1570년경)에 처음으로 유럽의 에스파냐에 전해졌다. 16세기에 유럽으로부터 인도와 중국에도 전해졌으며, 우리나라는 중국을 오가는 사신을 통해서 전해졌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조선왕조의 실학자인 이규경(李圭景)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순조 때인 갑신·을유 양년 사이(1824∼25)에 명천의 김(金)씨라는 사람이 북쪽에서 가지고 왔거나, 청나라 사람이 인삼을 몰래 캐가려고 왔다가 떨어뜨리고 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감자가 전래 내력과 재배법 등을 기술한 <원저보(圓藷譜)>를 저술한 김창한의 아버지가 순조 32년(1832)에 영국 상선인 로드 애머스트(Lord Amherst)호가 조선의 전라도에 왔을 때, 함께 타고 있던 구츨라프(Gutzlaff)라는 선교사가 의약·서적 따위와 함께 마령서(馬鈴蕃;감자의 한자 명칭)의 씨를 농민에게 나누어 주고 그 재배법도 가르쳐 주었는데 그는 이를 적극 보급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라에서는 감자를 심는 것을 금지하기도 하였다.
함경도 무산 수령인 이형재라는 사람이 감자 보급을 위하여 씨감자를 모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백성들은 이형재의 씨감자 모으기에 협조하지 않았다. 감자를 재배하는 데는 힘도 들지 않았으며, 세금으로 나라에 빼앗길 걱정도 없었기에 백성들은 감자를 많이 심었던 것이다. 감자 재배 면적이 늘어나자, 보리나 벼의 재배 면적이 줄어들었다. 이에 나라에서는 세금으로 거두어들일 쌀과 보리가 줄어들까 걱정을 하여 감자의 재배를 금지시켰던 것이다. 무산 백성들은 이형재가 감자를 수집할 때 처벌이 두려워 씨감자를 내놓지 않았던 것이다.
이형재는 고을 백성들에게 처벌을 하지 않으며, 씨감자를 제공하면 소금을 준다고 하여 백성들을 설득하여 씨감자를 수집할 수가 있었다. 이때 가뭄과 흉년으로 함경도와 강원도에 식량난을 겪게 되었다. 그러나 이형재의 감자 재배 덕분에 무사히 넘길 수가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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