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운 선생님/이재운선생님의 칼럼

쌍생쌍멸(雙生雙滅)

윤의사 2012. 1. 24. 11:07

2011년 8월 2일 경인일보에 연재된 이재운선생님의 칼럼입니다.

살다보면 너무 좋아 늘 가까이 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우연히 마주치는 것조차 싫은 사람이 있다. 집단이나 국가도 그렇다. 여당은 야당과 대척점에 있으며, 한국은 북한과 대척점에 있다. 미국과 중국은 미국-소련 관계가 무너지면서 저절로 대척점에서 만났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국가든,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항상 대칭이 되는 적이나 원수, 라이벌이 생기게 마련이다.

문제는 이러한 적이나 라이벌을 대하는 방식이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터무니없이 실력이 부족하거나 너무 세면 적이 되지 못한다. 비슷하니 적이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쌍으로 존재할 때 적이 되든지 대결을 하든지, 맞서든지 싸우든지 하는 것이다.

 

당장 일본 자민당의 극우성향 의원들이 독도를 일본 영토라고 주장하며 기어이 찾아가겠다고 시끄럽다. 그들이 하는 만큼 우리가 함께 떠들면 그게 뉴스가 되고, 그들이 부리는 억지만큼 우리가 같이 대응하면 사건이 된다. 대통령이 나서서 그들을 입국시키지 말라고 지시하거나 장관이 울릉도에 미리 가서 진치고 앉아 있는 건 하지하책이다. 그런다고 독도가 지켜지는 게 아니다. 용기가 있는 정치인이라면 쌍멸 차원에서 대마도에 가 시위를 벌이거나 쌍생 차원에서 후쿠시마에 가 봉사활동을 하는 게 낫다.

 

따지고 보면 대마도는 조선 땅이었지만 그들이 빼앗아간 섬이고, 유구(오키나와) 역시 독립국으로서 일본에 점령당한 섬나라다. 시각을 돌리면 국가간에는 할 말이 많다. 시간을 천년 정도로 늘리면 일본 자체를 우리 식민지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이런 만큼 일제 강점기에 저지른 저들의 죄악을 회개하지 못하고 벌이는 망동에 귀를 기울이거나, 애써 우리의 관심을 독도에 맞춰 줄 이유가 없다. 일제에 붙잡혀 가 강제로 위안부가 되고, 징용으로 강제노동을 하고, 징집되어 그들을 위해 싸우던 사람들이 살아 있고, 그때 죽은 사람들의 자식들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나라에 와서 침략의 향수를 찾아보겠다는 세 명 의원 때문에 우리가 이럴 필요가 없다. 우리 형제도 일제에 징병돼 끌려가던 아버지가 가까스로 탈출해준 덕분에 이 땅 이 자리에 살아 있다.

 

불교 가르침 중에 상생상멸(相生相滅)이란 말이 있다. 남을 돕는 것이 곧 나를 돕는 것이고, 남을 해치는 것은 곧 자기자신을 해친다는 의미다. 나는 이보다 좀 더 분명한 쌍생쌍멸(雙生雙滅)이란 표현을 쓰고자 한다. 동시에 태어나고, 동시에 사라진다는 의미다. 영웅은 같이 나고, 누군가 패배하면 승리자의 영광도 시들해진다.

 

라이벌이 특히 그렇다. 막상 서로 분초를 다투는 경쟁을 벌이지만 실제로는 떨어질 수 없는 쌍생 관계가 된다. 라이벌은 상대가 존재할 때 가치가 있다. 아사다 마오가 있을 때 김연아지 그 상대가 없으면 김연아도 설 자리가 없다. 남진이 있어야 나훈아가 있고, 마리아 칼라스가 있어야 레나타 테발디가 있다. 둘 중의 하나가 은퇴하면 다른 쪽도 저절로 빛을 잃는다.

 

역설이지만 적이 있을 때 나도 빛나는 것이다. 적이 없는 사람은 빛볼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

한국과 일본은 많은 부분 적으로 맞서기도 하고, 또 협력해온 경험도 있고, 역사를 공유하는 점도 많다. 우리나라가 오늘날 이같이 눈부신 발전을 이룬 데에는 우리의 라이벌 일본 때문인 것도 대단히 많다. 일본 또한 인류 역사상 최초로 핵폭탄 공격으로 무참한 패배를 당했지만 한국 덕분에 재기할 수 있었다.

 

이런 역사가 눈을 부릅뜨고 있는데, 일부 극우 의원 서너 명이 시끄럽게 군다고 해서 우리 국민 모두 일직선으로 일본을 바라볼 필요가 없다. 환자는 치료를 해줘야지 말로 나무란다고 고쳐지지 않는다. 우리는 피해자의 자손이고 저들은 가해자의 자손이다. 범인은 범행 현장에 꼭 찾아온다는 속설을 지키려는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