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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흑인 용병이 왔다?

윤의사 2011. 12. 21. 08:18

요즘 축구나 농구, 배구, 야구 등 프로 스포츠에서 많이 활약하는 선수들 중에는 외국인이 많다. 특히 남자 프로농구의 경우에 외국인 농구 선수 중 누구를 뽑느냐에 따라 우승과 꼴등을 차지하는 등 그들의 역할이 자못 증대하고 있다. 이들을 일컬어 흔히 용병(傭兵)이라고 한다.

그런데 조선시대 임진왜란때에도 용병이 우리나라에 왔다.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때에 명나라와 일본은 휴전 회담을 하였다. 그러나 휴전회담이 성과가 없이 끝나자 제2차 전쟁을 선포한 왜군의 재출병으로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조선은 또다시 명나라에 원병을 요청하였고 1598년 드디어 흑인용병이 조선에 들어왔다.

조선의 화가였던 김수운이 그린 그림에 당시 흑인 병사의 모습이 보인다. 당시 명나라 장수팽신고는 선조 31년(1598) 5월 왕에게 "제가 데리고 온 병사들 중에 파랑국(오늘날의 포르투갈) 사람으로 바다 셋을 건너고 조선과는 15만여 리나 떨어져 있는 곳에서 온 귀한 전투병입니다" 라고 흑인 병사를 소개하였다.

명나라 장수는 이들이 조총과 여러 가지 무예에 뛰어나며 특히 바닷속으로 들어가 한참을 있어도 되므로 왜군의 배를 공격하는데 많은 활약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선왕조실록>은 흑인용병의 모습을 한 마디로 바다귀신(海鬼)라고 하였다. 

   ‘먼저 노란 눈동자에 얼굴빛은 검고 사지와 온몸도 모두 검으며 턱수염과 머리카락은 모두 곱슬머리이며 검은 양털처럼 짧게 꼬부라져 있습니다. 이마는 대머리가 훌러덩 벗겨졌는데, 한 필이나 되는 누런 비단을 머리에 말아 올렸다.'

그리고 다른 책에서는 그들은 키가 워낙에 커서 말을 타지 못하고 수레를 타고 전쟁터로 이동하였다고 나와 있다.

이때는 전쟁의 막바지라 왜군들은 순천과 남해, 그리고 울산과 부산을 중심으로 왜성을 쌓으면서 저항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활약은 거의 없었던 듯 하다.

이익은 그의 저서 <성호사설>에서 흑인용병을 비판하였다. 이때 흑인 용병은 제독한토관병어왜총병관인 유정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유정은 경주에서 왜군를 공격할 때 단 한 번의 공을 세우지도 못했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해귀를 시켜 물속으로 들어가 왜선의 밑을 뚫어 배가 가라앉도록 하지 않았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이익의 말을 빌리면 이때 우리나라에 온 흑인 용병은 오늘날 바다를 통해 적을 공격하는 부대일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제대로 활약을 하지 못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