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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가 고종의 성묘를 위한 것?

윤의사 2011. 12. 18. 14:09

우리나라 전차는 경인철도 공사를 하기 위해 인천에 와 살던 기사 콜브란에 의해 놓여졌다. 콜브란은 고종에게 색다른 제안을 하였다.

“폐하, 청량리에 있는 명성황후마마의 릉으로 성묘를 1년에 두 번 하시는데, 행차하실 때마다 종로의 건물 중 일부를 부서야하고 10만원 정도의 비용이 드는 등 어려움이 많지 않습니까? 백성들에게 어려움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무슨 방안이더냐?”

“바로 전차를 운행하는 것입니다. 성묘를 전차로 가시면 백성들에게 불편함도 줄일뿐더러, 훨씬 바르게 사람들도 이동할 수 있습니다.”

“그대의 뜻이 옳도다.”

바로 고종의 허락을 받은 콜브란은 1898년 2월 1일 H.R. 보스트윅과 함께 한미전기회사를 세워 전차·전등·전화의 독점권을 행사하기로 조선정부와 계약을 맺었다. 이에 따라 1898년 10월 18일∼12월 25일에 서대문에서 청량리까지의 1단계 공사가 완공되었다. 이어서 1899년 5월 4일 동대문~경희궁 홍화문 사이 첫 운행에 성공하였으며, 5월 20일부터 정상 운행에 들어갔다. 경인철도가 개통되기 4개월 전이었다.

그러나 전차가 운행되자, 별다른 교통법규가 없었으며, 전차의 속도에 대한 개념을 알지 못한 조선 백성들이 전차에 치어 다치거나 죽는 등의 불상사도 생겼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백성들이 익숙할 때까지는 시속 8KM를 넘지 못하게 했으며, 나중에도 시속 24KM를 넘지 못하게 하였다.

당시 서울에는 1894년에 첫 도입한 인력거와 그 이듬해 들여온 자전거가 약간 있었을 뿐이어서 신기한 '탈 것'인 전차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정류장이 설치되어 있지 않았으며, 손님이 손만 들면 세워 태웠다.

이용승객이 급속히 늘어나자 같은 해 전차노선이 종로에서 남대문으로, 1900년에는 구용산(舊龍山;지금의 원효로4가)까지 연장되었다.

1909년 전차의 경영권이 일본으로 넘어가 일제강점기에는 부산과 평양에도 전차 노선이 건설되어 가장 중요한 시내 교통수단이 되었다.

그러나 8·15 후 버스가 등장하면서 도로 중앙을 지나는 전차는 교통의 흐름에 큰 지장을 주었다. 이에 따라 1969년 선로가 완전 철거되었다.

고종이나 순종이 성묘를 하는데 이용했던 전차는 양반 한량들이 기생과 데이트를 하는데 이용되기도 하였다. 초기의 전차는 상등칸과 하등칸이 있었다. 전5푼을 내는 하등칸은 최소한의 안전 장치 외에 사방이 트여 겨울에는 차가운 바람으로 추위에 떨어야만 하였다. 하지만 3전5푼을 내는 상등칸은 유리 창문이 드리워져 있어 바람을 막으면서 창밖의 경치를 감상할 수 있으니, 특별실의 승차권을 구입하여 기생에게 데이트를 요청하면 서슴없이 따라 나섰다고 한다.

 

 

민속박물관의 전차, 가운데 O부분의 차표를 가지면 기생들이 데이트하려고 따라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