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운 선생님/이재운선생님의 칼럼

언어소통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윤의사 2011. 12. 11. 08:36

얼마 전에 김문수 경기도지사가 불량배나 쓸 법한 상말로 춘향전을 해석했다가 곤욕을 치렀다. 무심코 내뱉은 말이지만 '춘향전은 변사또가 춘향이 따먹으려는' 이야기라고 말하는 순간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주인공이 춘향이인데 변사또 입장에서 바라보니 죄의식이라곤 전혀 들어 있지 않은 '따먹는다'는 불량어휘가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던 것이다. 춘향이 입장에서 보면 성폭행을 시도하려는 변사또에게 저항하는 이야기지만, 이렇게 뒤집혀버렸다.

 

 

야당이 추천한 헌법재판관 후보자가 천안함 피격이 북한 소행이냐는 질문에 대해 "직접 보지 못해 확신할 수 없다"는 말을 하여 국민들을 놀라게 했다. 말이란 이처럼 의사소통을 어렵게 하는 장애가 되는 수도 있다. 그림이 풍경화나 정물화로 머물 때는 메시지가 분명하지만 추상화로 넘어가면 해석이 구구해지는 것처럼 말도 수렵, 어업, 농업, 채집 같은 기본생활에서는 뜻이 분명한데 정치로 넘어가면 여기서부터 모호해진다.

 

 

또 이런 일도 있다.

 

"옆을 바라보며 두리번거리지 말고 똑바로 앞만 보고 공부해"라는 담임 선생님 말씀을 귀담아들은 한 학생은 실제로 학기 내내 앞만 바라보다가 정신과 치료를 받을 뻔했다. 이 학생은 옆을 봐야 할 때도 몸을 돌려 '앞'을 보았다. 주의집중을 강조하는 담임교사의 말을 잘못 해석한 것이다.

 

 

한 교회에서 목사가 '좁은 문'으로 다니라는 설교를 했더니 한 신도가 큰 문 두고 늘 쪽문으로만 다녔다. '좁은 문'이라는 의미를 신도 멋대로 해석한 해프닝이다.

 

 

일본인들은 종종 한국인 친구에게 "저희 집에 한번 왕림해 주시면 영광이겠습니다" 하고 인사해 놓고 정작 이들이 집에 찾아오면 깜짝 놀라 당황한단다. 일본인끼리는 그냥 허공에 날려버리는 일회용 인사치레일 뿐인데, 한국인들은 초청을 받으면 꼭 방문하는 게 예의라고 믿기 때문에 생기는 오해다.

 

 

옛날에 한 신하가 궁궐 담 너머에 잘 익은 홍시가 있기에 몰래 담을 넘어가 이 홍시를 따다 늙은 어머니에게 드렸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국왕은 이 신하를 효자라고 칭송하며 큰 상을 내렸다.

하지만 몇 년 뒤 이 신하가 사소한 사건에 휘말리자 심기가 불편해진 이 국왕은 오래 전 사건을 들춰 '궁궐에 침입한 도적죄'로 이 신하를 처형시켜버렸다. 그러니 앞서 이 신하를 효자라고 말할 때는 실은 "내가 기분 좋을 때까지만"이란 전제가 있었던 것이다. 왕조시대에는 이런 식의 어법이 너무나 많았다.

 

 

지방의 한 시장은 당선된 후 선거에 도움을 준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받들어 모시겠다"는 공수표를 찍어 돌렸다. 심지어 선거 때 얼굴을 비치지도 않은 사람, 멀리 다른 지방에 사는 손님에게도 "받들어 모시겠다"는 인사를 남발했다.

그런데 이 인사를 받은 사람들은 나중에 이 자치단체장을 가리켜 손가락질하며 배은망덕하다고 입을 모았다. "고맙습니다"란 인사를 해도 충분할 사람들에게 "받들어 모시겠다"는 과도한 인사를 남발함으로써 신용 자체를 잃어버린 것이다. 기실 그는 "마음으로 받들어 모시겠다"는 뜻이었는데 상대들은 자리라도 하나씩 주는 줄 기대한 것이다.

 

 

전에 김동리 선생이 "꼬집히면 벙어리도 울겠지" 하고 시를 읊자 친구인 서정주 선생이 "꽃이 피면 벙어리도 울겠지"로 잘못 알아듣고 "자네도 이제 시가 뭔지 알았구먼" 하고 칭찬했다는 일화가 있다.

 

 

말이란 이처럼 듣는 이에 따라, 하는 이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다. 그러니 말을 잘 해석해서 듣지 않으면 큰일난다.

 

싸우래서 열심히 달려나가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더니 막상 황제가 된 뒤에는 그들의 용맹이 겁난다고 다 처형시켜버린 주원장이 있다. 그런가 하면 칭기즈칸은 자신의 뺨에 화살을 쏜 적장 제베도 측근으로 거둬 평생 동지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