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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채판서

윤의사 2011. 5. 4. 08:12

 

우리나라 30대와 40대에게 인기있는 음식 중의 하나가 바로 잡채이다.

우리가 쉽게 먹을 수 있는 잡채이지만,

옛날에는 궁중에서 먹을 수 있는 귀한 음식이다.

이때 잡채는

오늘날 우리가 먹는 잡채와 달리 당면이 들어있지 않은

나물들을 섞어 만들었다.


잡채를 만들어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인물이 있다.

왕위에서 쫓겨나 실록이 아닌 일기로 남아있는 <광해군일기>(1608~1623년)에는

잡채를 만들어 호조판서가 된 이충을 빗댄 작자 미상의 시가 등장한다.

'沙蔘閣老權初重(사삼각로권초중, 처음에는 사삼각로의 권세가 중하더니)

雜菜尙書勢莫當(잡채상서세막당,  잡채상서의 세력을 당할 자가 없구나)'

이 시에서 사삼각로는 한효순이요, 잡채상서는 이충이다.

한효순은 광해왕 때 이이첨과 함께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켰으며,

사삼(더덕)으로 밀전병을 만들어 광해왕에게 바쳐 권력을 얻은 인물이다.

이충은 여러 가지 채소를 합쳐 만든 잡채를 만들어 그 맛이 오묘하여,

광해왕은 이충이 음식을 가져오기를 기다려 수저를 들었다고 할 정도이다.

광해왕의 마음을 얻은 이충은 호조판서가 되어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우리나라에서 만든 최초의 잡채가 바로 이충의 잡채이다.

  

1670년경에 발간된 <음식디미방>에 잡채에 대한 기록이 처음 보인다.
<원행을묘정리의궤>에도

정조대왕이 을묘년(1795년)에 현륭원에 행차할 때 잡채를 먹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때의 잡채는 오늘날처럼 당면이 들어가지 않은

채소들을 가늘게 썰어 무쳐먹는 정도였다.


당면이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것은

중국에서 당면을 만드는 기술을 배운 일본인이

1912년에 평양에 공장을 세우면서였다.

1919년에는 한국인인 양재하가 황해도 사리원에 당면 공장을 세우고,

중국인을 고용해서 천연 동결 방법으로 대량으로 생산하였다.

그러므로 당면이 들어간 잡채는 1920년 이후로 추정된다.

기록에 남은 것은 1924년에 쓰여진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

당면이 들어간 잡채가 나온다.


오늘날에는 다양하게 응용된 잡채 요리가 선보이고 있다.

우리 고유의 음식을 되살려 중국 요리나 일본 요리에 버금가는

한식 요리가 더욱 빛나기를 바란다.


아울러 권력자들은 주변 사람들을 잘 살펴야 한다.

단지 자신의 입맛을 맞추는 사람은 필시 다른 뜻이 있다.

권력자에게 쓰디쓴 말을 하는 가신이야말로

진정 나라와 주군을 위한 사람이라는 것을

이충이 다시 한 번 일깨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