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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소방서가 있었다?

윤의사 2011. 2. 22. 08:56

화재가 무섭기는 옛날에도 마찬가지였던 듯하다.

우리나라에서 화재를 예방하기 위한 제도는

멀리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진평왕 18년(596)에 영흥사(永興寺)에 불이 나서

왕이 친히 이재민을 위문, 구제했다는 기록이 있다.

오늘날처럼 소방이 독립된 행정관청은 아니었지만,

화재가 사회적으로 큰 불행한 사고로 생각하여

나라에서 구휼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남산에 화기(火氣)가 있다는 풍수 사상의 영향으로

화재에 대해 철저한 대비를 했다.

이 때문에 숭례문(崇禮門)의 현판을 가로가 아닌 세로로 달기까지 했다.


화재를 예방하기 위하여 한양을 건설하면서도

인접한 가옥과 가옥 사이에 화재 예방담(방화장:防火墻)을 설치하고

요소마다 우물을 팠으며(궁궐에는 ‘드므’라는 물통이 설치되었다),

방화기기를 설치하여 화재의 예방과 진압에 노력했다.


오늘날 소방공무원처럼 멸화군(滅火軍)을 조직하여

평소에는 불 끄는 훈련을 하면서 대기하다가,

불이 나면 곧바로 출동하였다.


세종 8년(1426) 2월에 화적(火賊)의 방화로 큰 불이 일어나자,

곧 ‘금화도감(禁火都監)’을 설치하여 화재의 방지와

천거(川渠:물의 근원이 가까이 있는 내)의 수리 및 소통을 담당하게 하였고, 화재가 나서 혼란한 사이를 이용하여

물건을 도둑질하는 자들을 잡도록 하였다.

관원은 제조(提調) 7인, 사(使) 5인, 부사(副使)․판관(判官) 각 6인을 두었다.


그러나 앞서 1422년 2월에 설치한 바 있는 성문도감(城門都監)과 함께

금화도감이 할 일이 없어짐에 따라 수성금화도감(修城禁火都監)이라 하고, 성벽의 수리, 화재 예방 업무 외에 천거․도로․교량 등을 수리하거나 고쳐 짓는 일도 맡게 하였다.

그 뒤에도 수성금화도감은 할 일이 없자,

세조 6년(1460) 5월에 도감을 폐지하고

수성의 업무는 공조(工曹)로,

금화의 업무는 한성부에서 담당하도록 했다.


소방 업무를 담당하는 관청이 없어지자 화재가 자주 발생하거나

도둑질을 위한 방화가 많이 일어남에 따라,

성종 12년(1481) 3월에 수성금화도감이 부활되었으며,

더 나아가 수성금화사(修城禁火司)로 격상되었다.


금화도감은 비록 독립 관청으로서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으나,

화재를 예방하는 독자적인 기구를 갖춘 점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소방관서로 볼 수 있다.


그 뒤 1894년 갑오개혁 이후에는 경찰 기구에서 소방 업무를 분담했다.


한편 조선시대에는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 화재와 관련된 법률을 엄격히 정해 놓았다.

태종 17년(1417) 호조의 건의에 의하여 실시한 금화령(禁火令)에는

다음과 같은 사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실수로 자기 집을 불태운 자는 태장 40대, 다른 집까지 불태운 자는 태장 50대, 종묘 및 궁궐까지 불태운 자는 목을 졸라 매어 죽이는 교살형(絞殺刑)에 처하고, 궁전 창고의 수위나 죄인을 간수하는 관리들이 불이 일어났다고 해서 장소를 떠나는 경우에는 곤장 100대의 처벌을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