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후반에 일본을 관광하고 온 사람들의 손에는 저마다 밥솥을 가지고 있었다. 코끼리밥솥으로 불리운 일본 밥솥은 우리나라 밥솥과 달리 밥을 오래도록 보관하여도 누렇게 변색되지 않는 장점이 있었다. 이에 우리나라에서 밥솥의 연구에 전념하여 일본의 기술을 따라 잡을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밥솥의 발전은 바로 수입 상품을 대체하기 위한 기술 개발이라고 할 수 있다. 수입을 대체하기 위해 기술이 개발되고 세계적인 명품으로 남은 것이 바로 고려 청자이다. 후삼국을 통일한 태조 왕건은 호족들을 포섭할 필요에서 혼인 정책을 펴나갔다. 혼인정책과 과거제도, 그리고 과거를 거치지 않고 관리가 될 수 있는 음서제, 관리가 죽은 후에도 후손들에게 상속되는 공음전으로 말미암아 고려에는 문벌귀족(門閥貴族)이라는 새로운 계층이 나타났다. 이들 귀족들은 정치․경제적으로 풍족한 생활을 하였다. 남들에게 과시할 필요를 느낀 이들 귀족들은 그릇과 장식품으로 도자기를 선택하였다. 당시에 도자기의 본고장은 바로 송나라였다. 그러나 송나라에서 생산되는 도자기의 가격은 만만치 않았다. 종류에 따라 차이가 있었지만 비싼 것은 쌀가격을 기준으로 50가마가 넘는 사치품이었던 것이다. 고려 정부는 국부가 송나라로 나가는 것을 막을 필요가 있었다. 이에 자기의 개발을 국가적인 사업으로 정한 고려 정부는 기술을 얻으려고 노력하였다. 자기의 기술은 국가 기밀 사업이었다. 자기를 만드는 데에는 흙을 고르는 문제, 1300도의 열에 견딜 수 있는 유약을 개발하는 문제, 색깔을 낼 수 있는 철분을 만드는 문제 등 어려움이 많았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 11-12세기에 비취색을 내는 상감청자를 만들었던 것이다. 당시에 자기를 만드는 기술이 첨단 기술이었다는 것은 16세기 말까지 세계에서 청자나 백자 같은 자기를 생산할 수 있는 국가가 세계에서 단 세 나라 밖에 없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가 있다. 즉 중국, 우리나라, 베트남이었다. 일본에서 도자기를 만든 것도 임진왜란 때 그들이 포로로 붙잡아 간 도공들의 덕분이었다. 유럽에서는 자기의 기술을 알아내기 위하여 기술자나 과학자를 감옥에 가두면서 기술을 얻으려고 했을 만큼 첨단 기술이 바로 도자기를 만드는 기술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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