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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는 신라이래 우리땅

윤의사 2008. 7. 17. 07:32
 

독도가 우리나라의 고유영토가 된 것은 삼국시대인 지증왕 13년(512)에 신라에 의해 우산국이 복속된 이후(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왕 13년조)라고 할 수 있다. 즉, 이때의 우산국은 울릉도뿐만 아니라 독도를 포함하고 있으며, 그 대표적인 증거로 '만기요람'(1808) 군정편의 "여지지에 이르기를 울릉도와 우산도는 모두 우산국의 땅"으로 알 수가 있다. 신라는 우산국을 정복할 때 무려 8년의 준비와 나무로 만든 사자라는 신무기까지 동원할 정도로 심혈을 기울였다.

  그 뒤 독도는 조선시대 태종 때에 섬의 백성들을 육지로 이동시키는 공도(空島)정책에 따라 울릉도의 백성들이 모두 육지로 이사를 하여 섬이 비게 되었다.

 공도정책이 이루어진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왜구의 잦은 침입이었다. 왜구들이 울릉도에 침입하여 많은 백성들이 피해를 당하자 조선의 정부는 공도정책을 펴게 되었던 것이다.

 섬이 비자, 일본의 어부들이 울릉도 주변에서 고기를 잡는다든지, 울릉도의 나무를 벌목하기 시작하였다.

  숙종 때에 경상좌도 수군절도사 관하 좌수영에서 전선의 노를 젖는 수졸이었던 안용복이 과거 낙동강 동쪽에서부터 경주 지역까지의 동남쪽의 바다를 방어하돈 경험을 바탕으로 울릉도 근처의 바다에 많은 물고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숙종 22년인 1696년 동래 출신 안용복 등 16명의 어부가 울릉도 부근으로 전복을 따러 갔다가 만난 일본 사람들이 안용복 일행을 죄인처럼 체포하여 오키시마를 거쳐 도쿠가와막부로 끌고갔다. 이에 안용복이 “울릉도와 독도는 우리나라에선 하루거리이지만, 당신 나라에서는 5일이나 걸리는 섬인데 어찌 일본 땅이란 말이오?”라는 주장에, 막부는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땅이 아니라는 사실을 글로써 분명하게 써주고 안용복을 대마도로 보냈다. 그러나 대마도주는 안용복이 가지고 있는 도쿠가와막부의 글을 빼앗고 90일간 감옥에 가두었다. 안용복은 부산에 와서도 50일동안 감옥에 갇혔다. 감옥에서 풀려난 안용복은 울릉도에서 고기를 잡는 일본 사람들을 잡아 대마도주에게 가서 울릉도가 조선땅임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나라에서는 안용복을 국경을 함부로 넘어들었다는 이유로 처벌을 하였다. 후에 이익은 <성호사설>이라는 책에서 ‘안용복은 영웅에 비교할만하다’고 그를 칭송하였다.    

  고종 때인 1882년에 공도정책이 철회되고 다음해 4월에는 각도에서 모집한 16호 54가구를 울릉도에 살게 하였다. 1900년 10월에는 울릉도를 군으로 승격시키면서 독도를 울릉군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1904년 9월 29일, 일본 원양업자 나카이 요자브로(中井養三郞)는 일본 내무.외무.농상무성에 '강치잡이를 위해 리앙쿠르 섬을 일본 영토로 편입시켜 달라'고 정부에 요청하였다. 리앙쿠르는 독도의 당시 프랑스어 표기였다. 일본 내무성은 '일본이 한국합병 야욕을 갖고 있다는 의심을 받는다'며 반대했다. 그러나 외무성은 "쓸데없는 의심"이라고 잘랐다. 청원은 받아들여져 일본 정부는 1905년 1월 28일에 독도를 무주지라고 하면서 시네마현에 포함시켰다. 여세를 몰아 일본은 1905년 8월 19일 해군용 독도 망루를 준공하였고, 같은 해 8월에 해군 6명을 독도에 주둔시켰다. 조선 정부는 1906년 음력 3월 5일 러일전쟁이 끝나고 일본에 의한 통감 정치가 시작된 뒤에야 대한제국 정부에 알려졌다. 대한제국 정부가 펄펄 뛰었지만 기우는 대한제국의 항변은 허망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함께 발표된 ‘맥아더 라인’에 의해 독도는 한국땅이 되었으며, 1952년 1월 18일에 ‘이승만 라인’으로 우리나라 영토임을 확실히 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주장에 대한 잘못된 점을 살펴보자.  

  우선 일본은 독도를 죽도(竹島)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독도에 대나무가 서식하지 않고 과거에 서식했다는 근거 또한 전혀 없다. 아마도 시네마현 근처의 어딘가에 제주도의 남쪽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상상의 섬인 마라도처럼 대나무를 많이 이용하는 죽도가 일본인의 상상의 섬이 아닐까 한다.

  다음으로 일본은 무주지(無主地)였기에 먼저 차지하는 나라가 차지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지증왕이래로 우리나라의 영토였으며, 1900년에는 공식적으로 울릉군의 한 부속도서로 편입을 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