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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묘호

윤의사 2006. 3. 21. 20:20
임금은 왕자 시절에는 나리로 불리웠고, 세자나 태자가 되면 저하나 전하로, 임금이 된 뒤에는 전하나 폐하 또는 상감마마로 불리웠다. 저하나 전하는 큰 나라라고 생각한 중국에 비해 우리나라를 낮추어 부르던 말이다. 그러나 고려 시대나 조선 시대 말기에는 우리나라에서도 폐하라는 말을 쓰기도 하였다.
임금이 자신의 이름을 쓸 때에는 다른 나라에 문서를 보낼 때 수결(오늘날의 사인)을 하였는데 이 때 자신의 이름을 썼다. 그리고는 자신의 이름을 불릴 기회가 없었다.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묘호는 중국에서 시작이 되었으며 왕조의 창시자는 태조(太祖) 또는 고조(高祖)라 하며, 그와 비슷한 공을 남김 임금에게는 태종이라 한다. 왕조가 끊어질 위험에서 나라를 구한 임금에게는 태조와 마찬가지로 ‘조'를 썼는데, 대개 세조라고 묘호를 짓게 된다. 우리나라의 수양대군 세조와 원나라의 쿠빌라이 세조가 이에 해당한다. 중국에서 한나라 때에는 묘호를 가진 임금이 적었지만, 그 후 점차 많이 쓰게 되어 당나라이후의 임금은 대개 묘호로 세상에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 임금의 시호를 처음 제정한 것은 신라 법흥왕(法興王)1년(514)이다. 그는 아버지가 죽자 <지증(智證) >이라는 시호를 처음으로 붙였으니, 이것이 왕에 대한 시호, 즉 묘호의 시초라고 하겠다. 이러한 묘호는 임금으로 있었던 기간동안 이루어 놓은 업적을 생각하여 묘호를 붙였다. 예를 들면 고구려의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은 영토를 나라 안밖으로 많이 넓혔기 때문이며, 장수왕(長壽王)은 오래 살면서 왕위를 오랫동안 하였기 때문이다. 신라의 법흥왕(法興王)은 불교를 진흥하고 율령(법:法)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세종(世宗)은 백성들을 위한 많은 정책을 실시하여 안정된 국가 생활을 영위했기 때문이며, 성종(成宗)은 조선시대의 모든 제도를 확립하여 국가 기반을 완성하였다 하여 묘호가 정해졌다. 그러나 묘호를 짓는 과정에서 임금이 크게 노하면서 고쳐지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면 조선 시대 16대 임금인 인조(仁祖)는 청나라의 침입인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국내적으로는 ‘이괄의 난'과 ‘아들과 손자'까지 죽음에 이르도록 해 처음에는 신하들이 열조(烈祖)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러자 아들인 효종이 반대하면서 크게 노하여 ‘열(烈)'자가 ‘인(仁)'자로 바뀌게 된 것이다.
그런데, 조선 시대의 왕계표를 보면 태조 정종 태종 세종 문종 단종 세조…의 순서대로 나가는데, 묘호 뒤의 조(祖)와 종(宗)은 어떻게 다른지 궁금할 것이다. 조선 시대 27명의 임금 중 조(祖)자 임금은 7명, 종(宗)자 임금은 18명이 있다. 조(祖)를 붙인 임금의 재위 기간에는 외적의 침입을 받는다든가, 국가적으로 변란이 있어 임금의 묘호 뒷자에 조(祖)가 붙었으며, 종(宗)은 국가적으로 태평성대를 누리며 별다른 무리 없이 왕위를 이은 임금 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선조(宣祖)와 인조(仁祖)때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외적의 침입이 있었으며 세종(世宗)은 한글을 창제하는 등 백성의 생활이 안정되었다. 즉, ‘조'는 왕조를 처음 열거나 나라를 크게 발전시킨 왕에게, ‘종'은 평화롭게 대를 이어 나라를 다스린 왕에게 붙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