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동쌤의 역사 속의 오늘은?

2월11일 오늘의 역사, 영국의 헨리 8세 수장령 선포

윤의사 2025. 2. 11. 19:53

신 중심의 사회인 중세 카톨릭 교회는 형식에 치우치고 부패가 만연하였다.

그래서 인문주의자들은 교회의 개혁을 주장하였고, 일부 성직자들은 성서에 기반을 둔 교회의 개혁을 주장하다가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교회 개혁 운동에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면벌부 판매’이다. 특히 성베드로 성당을 지으면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교황 레오 10세는 ‘면벌부’를 판매하였다.

이에 대해 16세기 초  신학자인 루터는 ‘95개조의 반박문’을 발표하였다. 그는 인간이 지은 죄가 면벌부에 의해 면제되지 않으며, 오직 성서에 기반을 둔 믿음파 신의 은총에 의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루터파는 아우구스부르크 화의(1555)에서 루터파 교회가 정식으로 승인을 받았다.

한편 스위스에선 루터의 개혁에 이어 갈뱅이 종교 개혁을 주장하였다. 예정설과 자기의 직업에 충실하며 검소한 생활을 할 것을 강조해 자영 상공업자에게 환영을 받아 프랑스에서는 위그노, 영국에서는 프로테스탄트(청교도), 네덜란드에서는 고이센, 스코틀랜드에서는 장로파로 널리 퍼져, 오늘날 서구 사회의 합리주의 정신의 모체가 되었다.

이러한 종교적 배경 아래 영국에서도 정치적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헨리 8세는 왕비 캐서린과의 사이에 아들이 없어 항상 불만이었다. 이 불만은 캐서린의 시녀인 앤볼린에 눈길을 돌리게 되었다. 결국 이혼을 할 수 없다는 카톨릭교에서 독립하여 엔볼린과 결혼을 한 헨리 8세는 아쉬움속에서 엘리자베스를 낳았다. 아들을 기대했던 헨리 8세의 실망은 엔볼린을 런던탑에 유폐하였다가 1536년 처형하였다.

이로써 영국은 로마카톨릭교회에서 독립하는 계기가 되었고, 1534년 2월 8일 의회를 통과해 헨리 8세가 영국 교회의 최고 책임자임을 공포한 것이다.

수장령으로 영국교회의 수장은 영국 국왕이며, 교황의 권위를 부정하면서 모든 성직자와 관리들은 영국 국왕에게 충성을 해야하는데, 이를 어길 경우 반역자로 처벌하고, 교황청 소속의 영국 내 모든 재산은 국왕의 소유가 되며 교회의 권력 구조도 국왕의 통제 아래 둔다는 것이다.

수장령의 발표로 영국에서 종교적 갈등도 있었지만, 헨리 8세의 딸인 엘리자베스 1세가 영국 국교회(성공회)를 확립하였다. 이로써 영국은 종교적 독립성과 국가 주권을 확립하게 되었으며, 다른 유럽 국가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사진:서울관광재단)

성공회 서울 본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