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동쌤의 역사 속의 오늘은?

7월19일 오늘의 역사 일본의 강제 고종 양위

윤의사 2024. 7. 19. 20:16

1907719, 고종은 헤이그 특사 사건에 대한 일본의 협박에 못 이겨 순종에게 위임했다가 바로 양위한 사건이다.

헤이그 특사 사건은 고종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참가하기 위한 특사로 이상설, 이준, 이위종과 호머 헐버트를 파견하였던 사건으로 고종은 을사늑약이 본인이 원하지 않았지만 일본제국의 강압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전 세계에 알리면서 을사늑약을 무효화하고자 하였다.

이에 일본의 정치인과 언론은 통감인 이또 히로부미에게 책임을 추궁했고, 이또 히로부미는 고종에게 책임을 추궁했다.

이완용 내각총리대신은 고종의 양위로 사태를 해결하려고 했다.

190771일 일본 외무성에서 이또 히로부미 앞으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보낸 밀서가 보내졌다.

궁지에 몰린 이또 히로부미는 이 기회를 이용해 한국의 주권을 빼앗으려고 했으며,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이것은 일본제국과 전쟁을 하자"는 것이라며 선전포고라고 협박했다.

총리대신 이완용은 고종에게 순종의 황제 대리청정을 시키자고 했지만 고종은 거부하였다.

이토 히로부미의 지시로 이완용 내각은 76일 내각 회의를 열어 헤이그 밀사 사건의 책임이 고종에게 있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곧바로 덕수궁으로 가서 어전 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송병준은

"헤이그 밀사 사건은 이제야 정치적으로 중대한 문제가 되었고 일본 정부나 이토 히로부미 통감도 격분하고 있으며 이대로 둔다면 어떠한 중대사가 일어날지 모르니 폐하께서 사직의 안위를 염려한다면 차제에 자결함으로써 사직의 위기를 구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고 협박했다. 고종이 다른 대신들의 의견을 물었으나 의견을 내는 관리가 없자, 송병준은 다시

"폐하, 만일 자결하지 못한다면 도쿄에 가서 일본 천황 폐하에게 사죄하거나 그렇지 못한다면 일전하여 항복한 후 하세가와 대장에게 비는 수밖에 없다"

고 거듭 협박하였다.

마음이 상한 고종이 자리를 떠나자 내각은 일치하여 황위를 황태자에게 넘기도록 할 것을 결의하였다.

같은 날 제3차 어전회의에서 이병무가 칼로 위협하니, 고종은 하는 수 없이 물러나고 719일 오전 양위식이 거행되었다.

양위식에는 고종과 순종이 참여하지 않았고, 궁내부 대신인 박영효도 양위를 반대하며 병을 핑계로 출근하지 않자

이완용이 궁내부 대신 서리로 이를 주관하였다.

같은 시각 고종의 양위 소식을 들은 반일단체 동우회는 이완용의 집을 불태워 10만원 상당의 피해와 조상들의 신주를 모두 불태웠고 이완용 가족은 일본제국 외교사무실로 피신했다. 매국노 이완용이 조상 신주를 태운 것이 가슴 아프다고 했을 정도였다.

이 사건 이후 매국노의 대명사는 송병준도, 이병무도 아닌 이완용으로 국민들의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이완용은 양위식이 끝나고 국민들의 이완용을 죽여라하는 함성에 이또 히로부미의 통감 관저로 피신했다.

이후 724일에는 정미 7조약이 체결되어 군대가 해산되므로 대한제국은 이름뿐인 나라가 되었다.

이완용은 을사오적·정미7·경술국적에 모두 속하고, 이병무는 정미7·경술국적에 속하며, 송병준은 정미7적에 참여한 매국노이다.(사진:독립기념관)

왼쪽부터 매국노 이완용, 송병준, 이병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