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동쌤의 역사 속의 오늘은?

7월21일 오늘의 역사 동학 2대 교주 최시형

윤의사 2024. 7. 21. 10:09

동학의 제2대 교주

심한 탄압 속에서도 열심히 포교하고 교단을 정비하여 동학을 크게 성장시켰다. 법적으로 동학을 인정받기 위해 온건하게 투쟁하였으나, 나라에서 약속을 지키지 않자 교조 신원 운동과 갑오 농민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어릴 때 이름은 경상, 자는 경오, 호는 해월이다.

 

최시형은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며 어렵게 자랐다. 하지만 의리가 있어서 주위에 따르는 사람이 많았는데, 경주에 살 때는 마을 대표인 집강으로 뽑혀 6년 동안 성실하게 일하였다.

그는 생활이 어려워 자주 이사를 다니다가, 서른 살이 넘어 최제우를 만났다. 그 후 매달 서너 차례씩 최제우를 찾아가 설교를 듣고 도를 닦으며 동학의 진리를 깨우쳐 나갔다. 그런 다음 각지를 돌아다니며 동학을 널리 알리는 일을 하였다.

 

2대 교주가 되어 동학을 널리 퍼뜨리다

최제우가 체포되면서 최시형은 제2대 교주가 되었다. 동학에 대한 탄압이 더욱 심해지면서, 이듬해 최제우가 처형당하고 최시형도 도망을 다녀야 했다. 하지만 끊임없이 동학을 전하고 흩어진 교도를 한데 모으기 위해 힘썼다.

그리고 교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동학 경전인 <동경대전> <용담유사>를 펴내고, 교접제, 육임제 등을 통해 교단을 정비하였다. 이런 최시형의 노력으로 동학은 더욱 널리 퍼지게 되었다.

 

교조 신원을 요구하고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하다

최시형은 1892 11월에 전라도 삼례에서 수천 명의 동학교도 집회를 열었다. 그리고 동학에 대한 박해를 그만두고 최제우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듬해 2월에는 경복궁 앞에서 상소를 올리고, 곧이어 2만여 명이 모인 충청도 보은에서 신앙의 자유뿐만 아니라 외세를 물리치고 부패한 관리를 처벌해달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던 중 호남의 접주 전봉준이 갑오 농민 전쟁을 일으켰다. 최시형은 처음에 시기가 너무 이르다며 반대했지만, 곧 동학군을 일으켜 전봉준을 도왔다. 그리고 전봉준이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다시 군사를 일으키자, 최시형도 10여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싸움에 나섰다. 그러나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정부군에게 밀려 공주와 정수 등에서 크게 패하고 말았다. 갑오 농민 운동이 진압된 뒤 최시형은 숨어 다니며 포교에 힘쓰고 손병희에게 도통을 넘기고 1898년 원주에 피신해있다가 최시형은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고 재판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재판을 진행한 고등법원 판사는 고부군수였던 조병갑으로 최시형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같은 해에 죽음을 당하였다.

 

"우리민족에게는 두가지 큰 패풍이있으니, 적서의 차벌과 반상의 차별이다.

적서의 차별은 가정을 망하게 하고, 반상의 차별은 나라가 망하는 원인이다."

최시형은 동학의 교주이지만 사회개혁을 위한 사회운동가 이기도 하였다.

 

이후 동학은 3대 교주인 손병희에 의해 동학에서 천도교로 명칭을 바꾸었다.

 

처형 직전의 최시형교주

 

여주군 금사면에 있는 최시형교주 묘

 

최시형묘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