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인물사/근,현대사 영웅만들기

송학선 의사

윤의사 2024. 5. 26. 11:38

송학선 의사는 1897년 2월 19일 서울 천연동에서 송성근과 부인 김씨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909년 서대문공립심상고등소학교 1학년 때인 13세에 아버지의 파산으로 학교를 중퇴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생활을 하였다. 17살 이후부터 다시 가족과 살면서 인쇄소와 농구회사에 취직하여 가족과 같이 살았으나, 직장에서의 차별대우로 반일감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송학선 의사는 어릴적 하얼빈 의거를 행한 안중근 의사를 존경하면서 조선 총독 암살 의거로 반일의식을 나타내고 국민들에게 항일정신을 고취하고자 했다.

1926년 3월에 경성사진관에 미장일을 하기 위해 찾았다가 부엌에 떨어진 양식 칼을 발견하고 결심을 하였다. 
"내가 사이토 일본총독을 죽이고자 한 것이 몇 년 전부터의 소망이었는데, 좋은 칼이 없는 것이 한이었다!

오늘 이 칼을 얻은 것은 하늘이 주신 것이다."
송학선 의사는 경성사진관에서 주운 길이는 15cm 정도되는 고급 과도를 숫돌에 갈아 잘 보관하였다.

(재판 과정에서 송학선 의사를 살리기 위해 일본인 변호사는 "칼을 우연히 주었다"고 말하라고 했으나, 듣지 않았다.) 

1926년 4월 26일

순종황제가 세상을 떠난 소식을 들은 송학선 의사는 창덕궁의 망곡대열에 참가하였다.

송학선 의사는 빈소의 출입문이었던 창덕궁 금호문을 통해 일제의 주요 인물들이 다니는 것을 보고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 총독의 암살을 기획하였다.

1926년 4월 28일 창덕궁 안으로 일본인 3명이 탄 차를 본 송학선 의사는 그들이 조문을 마치고 나오는 오후 1시 경,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몰려 차가 잠시 정차하였다.

송학선 의사는 이때를 노려 금호문에서 사이토 마코토 총독 일행이라고 생각해 의거를 행하였다.

송학선 의사의 의거로 국수회 지부장 다카야마 다카유키, 경성부 평의원 사토 토라지로가 사망하고 경성부 평의원 이케다 나가지로가 부상을 입혔다.

거사 후 송학선 의사는 차에서 내려 휘문고보 쪽으로 달리자 일본 기마 순사 후지와라토쿠히와 서대문경찰서의 순사 오필환이 뒤따라오자 이들에게 자상을 입혀 후에 부상이 악화돼 죽음을 맞게 하는 성과를 올렸으나, 휘문고보 정문 앞에서 20여 명의 일경에게 포위되어 체포되었다.

송학선 의사는 사이토를 죽인 것으로 알았지만, 사실을 알고 실망했다.

1926년 5월 6일 송학선 의사는 살인 및 상해죄로 경성지방법원에 기소되었다.

1926년 7월 23일 송학선 의사는 일본인 변호사 마츠모토가 사형만을 막으려 노력했지만, 경성지방법원에서 살인 및 살인미수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가족과 변호사의 설득으로 상고까지 진행하였지만 최종적으로 1927년 2월 4일 경성고등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었다.

송학선 의사는 상고심 판결을 담담히 사형선고를 받아들이며 태연한 태도를 유지하였다.

1927년 5월 19일 일제 사법당국은 서대문형무소에서 비밀리에 송학선 의사에 대해 교수형을 집행하면서 향년 30세에 순국하였다.

 

“나는 주의자도 사상가도 아니다. 아무것도 모른다.

다만 우리나라를 강탈하고 우리 민족을 압박하는 놈들은 백번 죽어도 마땅하다는 것만은 무엇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총독을 못 죽인 것이 저승에 가서도 한이 되겠다.“

 

송학선 의사가 1926년 7월 재판정에서 발언한 진술내용은 의거를 일으킨 이유와 그의 독립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고 1966년 5월 18일 국립서울현충원에 송학선 묘역을 조성함으로서

그의 독립의지와 의거를 기리고 있다.

송학선 의사(출처:서대문형무소역사관)
창덕궁 금호문 옆의 의거 표지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