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인물사/근,현대사 영웅만들기

매헌윤봉길의사

윤의사 2024. 5. 1. 16:12

4월 27일부터 4월 30일까지 매헌윤봉길의사 상하이 의거 92주년 행사단과 함께 중국 상하이를 갔다.

윤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11시 40분 일제가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일왕 생일과 상하이 사변 승리를 기념하는 축하 행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단상을 향해 물통 폭탄을 투척해 일본을 공포에 떨게 했다.
총사령관인 시라카와 요시노리와 상해 일본거류민단장인 가와바타 사다쓰구는 사망하고, 중국 공사 시게미쓰 마모루는 오른쪽 다리가 부러졌으며, 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 중장은 왼쪽 다리가 잘리었고, 3함대 사령관인 노무라 기치사부로 중장은 오른쪽 눈을 잃었다. 특히 시게미쓰 공사는 1945년 미국  미주리함에서 외무장관으로 일본을 대표해 항복문서에 서명한 사람이다.
중국 국민당 장제스 총통은 "중국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했다"고 극찬하면서 월세도 제대로 내지못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적극 후원하였으며,  이후 독립군 양성을 지원했다.
윤 의사의 상하이 의거로 일제의 독립독립운동가, 특히 백범에 대한 감시와 추적은 계속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항저우, 가흥, 충칭으로 무려 4천㎞를 이동했으며, 이 과정에서 항일전쟁을 위해 광복군을 조직하였다.
윤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거사 직후 체포 연행되었다.

일제는 시라카와의 죽음을 '전상(戰傷)에 의한 죽음'이라고 하면서 윤 의사는 전쟁 중이라면서 단심제에 의한 재판을 군법회의로 진행해  5월 25일 사형을 선고받았다. 일본의 이중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전쟁 중 부상이라고 하는 것은 쌍방이 서로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야만 하는 것이고, 윤 의사는 당연히 포로로 대우를 했어야 했다.

그럼에도 윤 의사를 단심에 의해 선고를 한다든가, 군법회의를 한 것, 교수형이 아닌 총살형을 한 것은 분명 윤 의사의 의거는 전투라 하겠으며, 당연히 포로로, 그리고 윤 의사는 무죄(無罪)라는 것을 입증한 셈이다. 

하지만 윤 의사릐 전투를 '테러(북한이나 북한을 두둔하는 사람들은 김일성의 독립운동을 과장하기 위해)'라고 평가절하하고 있다. 이는 분명 잘못된 것이다. 테러는 다수의 민간인을 대상으로 살상을 하는 것이지만, 윤 의사의 상하이 의거에서는 민간인이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일제가 스스로 인정한 전투인 것이다. 

윤 의사는 11월 18일 일본 우편 수송선인 다이요마루(大洋丸) 호를 타고 3일 간의 항해 끝에 고베항에 도착 했고, 오사카로 이동하여 위수형무소에 수감 되었다. 12월 18일 오후, 삼엄한 경비 아래에  오사카에서 가나자와의 제9사단 유치장으로 옮겨졌다. 제9사단장은 바로 홍커우공원에서 중상을 당한 우에다 겐키치 중장이었기에, 이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함이었다. 1932년 12월 19일 오전 6시였다.

윤 의사는 무장한 헌병들과 함께 유치장 을 나섰다. 7시가 넘어 미고우시 공병작업장 에 도착하였다.

총살형을 집행할 10명의 헌병 과 집행관이 긴장하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네모토 검찰관이 매헌에게 말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느냐?”

“아직은 힘이 없어 외세의 지배를 받지만 머지 않아 독립은 실현될 것으로 믿는다. 대한 남아 로 할 일을 하고 미련 없이 떠나가오.”

윤 의사는 십자로 된 형틀에 묶였다. 일본 헌병들 은 매헌의 눈을 가리고 바닥의 거적에 무릎을 꿇렸다.

7시 40분, 교외 미쓰코치 공병작업장 내 산골짜기에서 잔혹하게 총살되어 24세를 일기로 순국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윤봉길 의사의 항일독립운동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기념식이 열린 훙커우 공원의 매헌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