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인물사/근,현대사 영웅만들기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잠든 외국인

윤의사 2023. 6. 8. 17:34

6·25사변은 북한 김일성이 소련의 사주를 받아 일으킨 전쟁으로 우리 민족끼리 총칼을 겨누고 인명을 살상한 현대사의 비극이었다. 이 전쟁은 중국인에게도 동족상잔의 아픔을 전해준 전쟁이었다.

6.25사변이 발발했을 때 장제스 정부는 우리나라에 대한 지지를 발표하면서 화교들로 하여금 전쟁에 참여할 수 있게 비공식적 지원을 하였다. 유엔의 지원으로 통일이 되기 직전 중화인민공화국(중공) 군대가 '() 제국주의의 확산을 막고 혈맹 조선(북한)을 돕는다'는 항미원조(抗美援朝)를 명분으로 참전하면서 동족상잔의 아픔을 우리와 함께 하게 되었다. 그들은  '2의 조국'인 한국을 지켜내고자 젊음을 바친 분들을 소개하며 감사와 극락왕생을 기원합니다. 

 

강혜림 의사는 19251025일 중화민국 산동성 서하현에서 태어났다.

중국 국민당의 국부군(國府軍) 부대원으로 중국 공산당의 홍군(紅軍)과의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다.

평양에 거주하며 중화요리 음식점을 운영하던 중, 1950년 겨울 평양수복을 계기로 한국 육군 제1사단 15연대에 종군하여 적군의 동향 수색과 포로 심문 등의 임무를 맡았는데, 그가 속한 부대를 '중국인 특별 수색대'라고 불렀다.

19511월 말 국군 15연대는 서울 재탈환을 목표로 경기도 안성에서 과천까지 밀고 올라갔다.

중공군은 관악산 주요 봉우리에 진지를 구축해 돌파가 쉽지 않았다. 더구나 이 부대는 중공인민위(中共人民委)에서 내린 최우수 부대기까지 가진 정예부대로 아군이 사격을 하면 참호 속에 숨어있다가 사격을 멈추면 참호 밖으로 나와 공격을 하였다.

195122, 강혜림은 중공군으로 위장해 적진에 침투했다. 참호와 참호 사이를 포복으로 접근해 수류탄으로 참호 속의 중공군 진지 8곳을 격파하였다. 잠시 휴식을 명령받은 중국인 특별 수색대였지만, 국군이 공격하자 중공군은 참호 속으로 숨어버려 상대하기가 어려웠다. 이에 강혜림이 소련제 기관총을 가지고 참호 속의 중공군을 공격하다가 실탄이 떨어져 백병전을 벌이던 중 중공군의 총탄을 맞고 27세의 나이로 195122일 숨졌다. 죽음을 무릅쓴 그의 활약으로 국군은 관악산을 점령할 수 있었다.

그의 유해는 동지들에 의해 부산 화교소학교에 임시 안치됐다가 정부가 주한 자유중국(대만) 대사관과 화교 전우들로부터 군묘지에 안장하여 줄 것을 요청받고 정부에서는 1964. 11. 13. 110회 국무회의에서 국립묘지에 안장할 것을 의결, 19641212일 국립묘지 제24묘역에 안장했다.

외국인으로서는 국립묘지(국립서울현충원) 안장이 처음이다. 생전의 공적으로 1959. 6. 1. 은성화랑무공훈장을 추서 받았으며, 화교의 사기와 우방국과의 유대강화를 위하여 우리 전몰용사와 같은 대우로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하게 된 것이다.(사진:국립서울현충원)

국립서울현충원 강혜림 의사 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