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동쌤의 역사 속의 오늘은?

1월 14일(음) 오늘의 역사, 정묘호란이 일어났다

윤의사 2022. 1. 14. 14:03

1623년, 능양군은 광해군을 축출하고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바로 인조반정이다.

후금을 건국한 누르하치는 1626년 영원성을 공격하다가 패하면서 화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그의 8남인 홍타이지가 뒤를 이었다.

때마침 흉년으로 인해 백성들이 굶주림에 허덕이자 홍타이지는 식량을 확보하면서

명나라를 공격할 때 조선이 배후에서 공격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조선 침략을 계획하였다.

3만의 병력을 이끈 아민은 1627년 1월 8일에 심양을 출발하여, 14일에 의주를 공격하였다.

당시 의주는 이괄의 난으로 군세가 약화된 상태였으며,

이괄의 난으로 후금으로 도망간 이괄의 부하 한명련의 아들인 한윤이 평안도 지리와 군세에 밝아

쉽게 의주를 점령할 수 있었다.

이때 조선의 명장인 남이흥 장군이 안주를 지키고 있었으나 후금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남은 화약을 적에게 넘겨주지 않기 위해 화약고에 불을 지르고 자결하였다.

1월 23일에 평양을 점령하고 남하를 하니 인조는 장만으로 하여금 후금군을 막게 했다.

장만은 인조에게 조총수 100명의 지원을 요청했지만,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가는 자신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오직 자신의 안위 뿐 백성의 고통은...

(현재 정치와 거의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 

후금은 군사를 일으킬 때 조선과의 화친과 명과의 관계 청산을 조선에 요구하였다.

하지만 군사력도 준비는 안하면서 이를 거절하고, 명나라와의 관계는 고집하였다.

전쟁이 길어질 것을 우려한 후금은 형제관계와 명나라와의 관계는 인정하는 조건으로 화친하였다.

합의안에는 '조선과 후금은 형제가 되며, 후금은 화약이 성립되면 군사를 철수시키고,

양국은 서로 영토를 지켜 압록강을 넘지 않으며, 조선은 명과 단교하지 않고,

조선 임금의 동생을 후금에 인질로 보내며, 매년 사신을 교환하고 개시 무역을 한다'를 규정하고 있다.

조선에서는 대책도 없이 인조의 동생 대신 종실 원창령을 원창군으로 둔갑시켜 후금으로 보내 후에 화의 근원이 되었다.

1627년 3월 3일 조선과 후금의 화맹의식이 있었다. 

인조는 강화도 연미정에 검은 옷을 입고 나타나 향을 피우고 하늘에 맹세하는 의식을 행한 후

행궁으로 돌아갔다. 

후금은 서로의 신의를 확인하고자 흰말과 검은소로 희생을 잡아 하늘에 맹세하도록 했고,

조선과 후금의 신하는 서로 배신하지 않겠다는 맹세문을 낭독하고 희생된 제물의 피를 마시며

두 나라가 형제가 되었음을 굳게 맹세하였다.

이 모습을 지켜본 정온은

검은 소에다가 흰말을 겸했다/ 비린내 나는 피 쟁반에 가득/

상국은 배알이 뒤틀리지도 않는지/모신의 얼굴에는 기쁨이어라/

망나니들이 예식을 말하고/짐승들 속에 사람이 섞였어라

정묘호란 때 자살한 남이흥 장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