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동쌤의 역사 속의 오늘은?

1월 11일 오늘의 역사, 태평천국의 난이 발생

윤의사 2022. 1. 11. 10:03

1851년에 들어서 홍수전은 태평천국(太平天國)’이라는 국호를 세우고 스스로 천왕(天王)’이라 칭하였다.

그리고 영안성에서 양수청을 동왕(東王), 위창휘를 북왕(北王), 석달개를 익왕(翼王), 소조귀를 서왕(西王)에 봉해서 군사 정부적인 체제를 갖추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홍수전은 차츰 종교적인 지도자로, 태평천국군은 동왕 양수청이 지휘하였다.

태평천국이란 상제의 명령과 가호를 받아 평화롭고 평등한 지상천국을 수립한다는 기원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리고 111, 상제회는 홍수전의 36번째 생일을 맞아 정식으로 봉기를 선언하였다.

가자, 모든 사람이 태평을 누릴 수 있는 태평천국을 건설하자!”

지상천국 건설의 의지로 굳게 다진 혁명군단은 금전촌을 출발하였다.

한편, 봉기가 일어나자 객가 출신의 청나라군 수천 명이 태평군 쪽으로 돌아섰다. 청조의 변발에 반발하여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태평군은 장발군(長髮軍)이 되었다. 1년 여에 걸쳐 광서 지역을 휩쓸고 북상하였다. 그리하여 호북성의 성도이며 천하의 요충지인 무창 등을 함락하고 곳곳의 빈농, 부랑민, 수공업 노동자 등을 흡수하였다.

태평군의 수효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수군과 육군을 합하여 무려 1백만여 명에 이르는 대군으로 성장한 태평군은 순식간에 중국의 절반을 휩쓸었다.

18533, 남경에 입성하여 그곳을 천경으로 태평천국의 수도로 삼고, 양강 총독의 관아를 천왕부(天王府)라 명명하였다. 이로써 중국에는 두 개의 나라가 존재하게 되었다. 중국의 북쪽은 무능한 청나라가, 그리고 남쪽은 공상적 이상주의를 내건 태평천국이 지배하게 된 것이었다.

새로 들어선 태평천국은 그야말로 반봉건 혁명을 이루어나가는 듯이 보였다. 천조전무제(天朝田畝制)는 반봉건의 대표적인 제도였다.

토지를 분배할 때에는 사람 수를 대상으로 남녀의 차별없이 각 집의 가족 수에 따라 나눈다. 천하 사람들은 천부(天父). 상주(上主), 황상제(皇上帝)의 복을 같이 받는다

천조전무제에는 토지의 균등 분배와 신분 평등, 남녀 평등이라는 반봉건적 요소를 앞세워 지금까지 수동적으로 살아온 농민들을 능동적으로 움직이게 한 제도였다. 그러나 공상적 사회주의가 현실에 적용되는데 무리가 있었던 것처럼, 태평천국의 유토피아 역시 의지와 광기만으로 실현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개혁작업은 곧 한계에 부딪쳤다. 복잡한 현실에 이상적인 제도를 도입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악덕지주, 부패한 관료 등을 가차없이 공격하면서 태평군과 농민들은 승승장구하였지만 태평군의 지도부는 이러한 상황을 의식적인 토지혁명으로 제도화시키지 못하였으며, 남경의 중앙정부는 점점 왕조적인 체제에 젖어가면서 권위를 내세우기 시작하였고, 권력을 둘러싼 암투가 시작되었다.

억압당하는 처지에 있는 인간은 현실의 모순에 분개하면서 사회적 이상을 꿈꾸게 된다. 그리고 그런 이상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그 꿈을 실현해나가는 과정을 보면 때로는 아름답고 감동적이다.

그러나 그 이상을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고도의 정치적 능력이 결여되었을 때, 인간이 가진 이중성의 한 면인 개인적 욕심이 고개를 쳐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욕심은 인간들을 목구멍만 넘어가면 뜨거움을 잊어버린다는 속담처럼, 저 암울하고 괴로왔던 지난날을 쉽게 잊어버리고 어느덧 억압자의 입장에 서게 만드는 것이다. 천왕부가 불타버리자 홍수전은 천왕부의 재건을 명하고 황금색 비단으로 장식하는 등 호화롭게 건설하였다. 이것을 본 태평천국의 간부가 홍수전에게 말했다.

성상, 아직 통일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간부의 말에 홍수전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호화로운 궁궐에서 나오지 않으면서 여자들 속에 파묻혀 지냈다. 금욕적인 생활을 강조한 홍수전이 스스로 이 규율을 어기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내부분열과 초심을 잃은 점, 그리고 막강한 무기와 군사력을 앞세운 영국과 프랑스 군대의 공격으로 14년 만에 막을 내렸다. 하지만 태평천국운동은 중국농민운동의 출발점이라고 하겠다.(민병덕의 <반역의 세계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