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문화사전/역사뉴스

위구르의 독립을 응원합시다

윤의사 2021. 5. 3. 14:31

<서유기>에 등장하는 삼장법사인 현장법사가 인도를 가기 위해 거쳐간 길인 서역,

실크로드, 즉 비단길로 불리며 동서무역로로서, 현재 중국이 추진하는  '일대일로'(One Belt One Road)의 중요한 요충지이기도 한 바로 이곳이 위구르족이 사는 곳이다.

18세기 청나라가 이 지역을 정복하고는 '새로운 강토'라는 뜻으로 '신장(新疆)'이라는

지명을 붙인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위구르'의 뜻은 위구르어로 '단결'과 '연합'을 뜻한다.

위구르족의 조상은 바이칼호 남쪽 지역과 예니세이강 유역에서

천막을 싣기 위한 큰 마차를 끌고 다니기에 '고거(高車: 가오처)'라 불리운 사람들이다.

예니세이강 유역의 풍부한 철광석을 바탕으로 철기문화가 발달하였다.

이후 흉노에 복속되어 무기를 제공하기도 했으며,

유연과 에프탈의 지배를 받다가 유연에 반란을 꾀했으나 유연의 지배를 받는 튀르크에 패배하였다.

유연과 에프탈이 돌궐에 패배하면서, 가오처는 독립하여 이 지역의 지배자로 등극하면서

'탈레스(鐵勒)'으로 불리게 되었다.

744년에는 돌궐 제2제국을 무너뜨리고 쿠틀룩 보일라이 외튀겐산에서부터 현 몽골고원에 이르는

위구르제국을 건국하였다.

757년에 당나라에서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수도 장안을 점령하기도 하였다.

위구르제국의 전성기는 759년부터 779년까지로 762년 뵈귀카칸이 이란계 소그드인에게서 마니교를 국교로 받아들이면서 유목의 전투적 성격에서 농경사회로 바뀌면서 군사력의 약화로 840년 다른 터키계 민족인 키르키즈에게 멸망하였다.

나라가 망하자 위구르 유민들은 간쑤, 신장, 텐산산맥 서쪽 추이강으로 이주하였다.

 

간쑤성으로 간 위구르족은 장예를 서울로 간수 왕국을 870년에 건국하였다.

이들은 유고르로 불리며, 국교를 라마교로 바꾸었는데, 다른 투르크계 민족이 이슬람교로 개종한 것과 다른 점이다.

이들은 1028년부터 9년에 걸쳐 탕구트 왕국과 전쟁을 하다 1036년 패하면서 멸망하였으며

위구르족과 분리된 중국의 소수민족인 유구르족으로 살도 있다.

 

서쪽으로 이주한 위구르 유민은 중가리아와 타임 분지에 사는 다른 투르크계 민족과

카라코야 왕국을 856년에서 866년 사이에 세웠다.

지배자는 신성한 부 또는 영광이라는 의미로 '이디쿠트'라고 불리웠고,

수도는 겨울에는 투르판, 여름에는 베쉬발릭으로 따듯한 지역을 발판삼았으며 불교를 기반으로 하였다.

위구르의 전통을 이어받았으며, 전성기인 981년에는 황옌더를 사절로 보내 정주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몽골이 전성기를 구가하면서 1209년에 복속되었다.

 

추이강으로 이주한 위구르족은 840년에 카라한(위대한 칸)이라 불리는 카라카니드 왕국이 건국되었다.

술탄 사툭 부그라 칸(재위:920-956)은 이슬람교로 개종을 하였고,

940년에는 카를룩의 수도를 점령하여 무슬림 연방이 되었다.

수도를 최초 추이강 계곡의 발라사군에서 카슈카르로 천도하였다.

불교 국가인 카라코야나 호탄으로부터 이슬람을 지켰으며, 모스크, 학교, 다리, 그리고 카라반의 숙소인 숙사가 지어졌다.

11세기 초부터 내분에 휩싸인 카라한 왕조는 11세기 말에 셀주크 투르크족에 복속을 강요받았다.

하지만 셀주크 투르크의 쇠락으로 우즈만이 부흥을 시도하다가 1212년 호라즘 왕조에 멸망되었다.

 

이후 유목민으로 흩어져 살다가 1759년 청나라에 지배를 받게 되었다. 

아편전쟁으로 청나라가 서구 열강의 침략을 받아 쇠퇴하자,

야쿱 벡이 아팍 호자의 후손을 왕으로 세우면서 카슈가리아 왕조(예티샤르:일곱 도시의 나라)를 열었다.

예티샤르는 카슈가르, 옐켄, 호탄, 아커슈, 쿠차, 쿠얼러, 투르판 등 일곱 도시를 지배한 위구르의 통일국가로

1872년에는 러시아가, 다음 해는 오스만 제국이, 그 다음 해에는 영국이 독립을 승인하였다.

야꿉 벡은 백성들로 부터 세금을 거둬 군사력을 키우고,

자신의 부족인 코칸트인을 등용하면서 위구르인들의 불만을 샀다.

야꿉 벡은 위구르인의 불만을 누르기 위해 스스로를 '이슬람의 수호자'라 하면서

백성들에게 이슬람의 율법을 지킬 것을 주문했다.

청나라에서는 좌종당을 보내 야꿉 벡을 진압하고자 했다.

야꿉 벡은 서구 열강의 지원을 받아 좌종당을 이길 수 있었으나,

좌종당의 회유 작전에 말려들어 죽음을 당했다.

 

청나라의 지배를 받던 위구르는 신해혁명으로 통제가 약해지면서

중국의 많은 군벌들과 독일, 미국에 의해 분열되었다.

1944년에는 장졔스와 모택동과의 사이에 국공합작이 이루어지고 항일투쟁을 하는 사이

일리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켜 타림 분지의 소수 민족과 함께 독자 임시정부를 수립하면서

동튀르키스탄공화국을 세웠다.

하지만 모택동이 중국을 차지한 1949년에 임시정부 주석 부르한 샤히디가 중국 공산당과 병합을 선언하면서,

부주석인 이사 유숩 알프텐킨을 따르는 많은 위구르 국민은 터키로 망명했다.

 

신장은 34개 성과 5개 자치구로 형성된 중국에서 가장 큰 지역으로

한반도의 7.8배인 160만제곱킬로미터가 넘는 면적으로 인도와 러시아 등 8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이곳은 동서무역로인 '실크로드'였기에 현재 중국이 추진 중인 '일대일로'의 중요한 거점이다.

중국이 이곳을 포기 못하는 이유는 바로 석유이다.

중국의 3대 유전 지역이면서 2017년에 다시 10억톤에 이르는 유전이 발견되었고,

송유 파이프 라인이 모여 있어 에너지 요충지라고 하겠다.

그러나 위구르인들이 누리는 혜택은 빈곤이고, 위구르의 종교와 문화가 터키에 가깝다보니

중국의 차별은 심하다.

더구나 중국의 한족화 정책에 반대하는 위구르인들의 독립 혹은 실질적 자치를 주장하여

1990년대 이후 반정부 시위와 유혈, 테러 등이 일어나고 있다.

중화사상으로 무장한 중국에게 위구르의 독립은 중국의 쇠퇴를 뜻한다고 하겠다.

중국의 쇠퇴는 한반도에 새로운 기운이 일어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러기에 위구르의 독립을 우리가 적극적으로 도와야 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