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인물사/근,현대사 영웅만들기

세한도를 우리에게 전한 손재형선생님

윤의사 2021. 4. 16. 16:21

조선 후기 서예가로 우리나라는 물론 청나라까지 알려진 김정희,

김정희는 중국에서 맥이 끊긴 서법을 금석학이라는 학문을 통해

실증적 고증을 바탕으로 '추사체'라는 고유의 서체를 완성하였다.

1840년, 김정희의 나이 쉰다섯일 때 아버지에게 사약이 내려졌다.

이때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사이의 권력 다툼으로 경주 김씨인 김정희 일가가 피해를 보았다.

김정희도 제주도 대정현에 유배되어 9년을 보냈다.

제주도 대정에 있는 김정희 유배지

제주도 유배를 갔다고 하는 것은 김정희에게는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제자인 역관 이상적은 청나라를 드나들면서 서책을 가져와

제주도에 있는 김정희에게 보냈기에 김정희의 유배지 생활은 외롭지는 않았다.

이상적에 대한 고마움을 그림으로 나타냈으니, 바로 〈세한도(歲寒圖)〉이다.

이상적은 〈세한도(歲寒圖)〉를 헌종 10년(1844)에 동지사로 가는 이정응을 수행하여

연경으로 가면서 가져갔다.

그리고 1845년 1월 13일 이상적은 청나라의 벗인 '오찬'의 초대연에서

이 그림을 청나라의 문인과 학자들에게 보여주었다.

제주도 대정의 추사관에 있는 세한도

 

연회에 참석한 오찬, 장요손, 장악진, 조진조, 반증위, 조무견 등 13명과

후에 댓글에 합류한 3명 등 모두 16명이 시와 글로써 감상글을 남겼으니

이를 '청유 십육가'라고 한다.

반증위의 댓글

김군(김정희)의 바다 밖의 뛰어난 영재,

일찍부터 그 명성 자자했네.

명성은 훼손되어 갈 곳도 없고

세상의 그물 속에 걸려버렸네.

도도하게 흘러가는 세속을 보니

선비의 맑은 정신 누가 알리오?

-반증위

 

이상적은 <세한도>를 제자인 김병선에게, 김병선은 아들인 김준학에게 물려주었다.

김준학은 1914년 1월과 2월에 앞부분과 청유십육가의 중간중간에

글과 시 등을남기면서 자신이 <세한도>의 소장자임을 분명히 하였다.

그후 <세한도>는 휘문고 설립자인 민영휘를 거쳐

일본인 서예가이자 최초의 김정희학 연구가라고 自稱한 일본인 후지쓰카 치카시의 손으로 넘어갔다.

후지츠카는 자신의 회갑을 맞아 영인본 100부를 인쇄하여 지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후지츠카의<세한도>에 대한 애정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2차 대전이 막바지에 이르자, 후지쓰카는 <세한도>를 가지고 일본으로 귀국하였다.

붓글씨도 예술의 하나로 평가하여 '書藝'라는 말을 처음 사용했던

진도 갑부 손재형이 일본 도쿄의 후지쓰카 집을 찾아갔다.

후지츠카가 원하는 것을 모두 주겠다고 하였으나 거절하자,

손재형은 100일 동안 후지츠카에게 인사를 하면서 그의 마음을 얻었다.

그리하여 '잘 보관하라'와 '김정희학의 동문사숙'이라는 후지츠카의 말만 들으면서

단 한푼도 받지 않고 <세한도>를 넘겨받았다.

손재형이 <세한도>를 인수한 뒤 1945년 3월 후지츠카의 집이 공습을 받았으니,

天運이라고 하겠다.

<세한도>의 주인이 된 손재형은 1949년 오세창, 이시영, 정인보의 발문(댓글)을 받았다.

손재형이 재산을 탕진하고 고리대금업자에게 <세한도>를 담보로 채무를 짓게 되었다.

채무를 갚을 길이 없는 손재형이 <세한도>를 포기하면서

개성 출신의 갑부인 손세기가 구입하였고,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