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 정책이 실시되어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 서서히 없어지고 있다.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냉대가 매우 커서 그들에게 많은 고통을 주었다.
이렇게 장애인에 대한 냉대와 차별이 생긴 것은 조선 후기와 일본의 지배를 받으면서
장애인에 대한 사회의 인식이 왜곡되었기 때문이다.
원래 우리나라에서는 장애인에 대하여 국가에서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졌으며, 이들을 지원하였다.
장애우를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없는 노인 등 이른바 ‘환과고독(鰥寡孤獨)’으로 생각하여
지원을 하였던 것이다.
먼저 이들 환과고독은 가족이 책임을 지도록 하였다.
가족에게 문제가 있어 장애우들을 더맡길 수 없으면 그 이웃이나 친척 등
마을공동체에서 지원해주도록 하였다.
그리고 장애우에 대한 나라의 지원 정책도 이어졌다.
먼저 갈 곳 없는 장애우들을 위하여 명통사(明通寺)를 세웠다.
이곳에 거주하는 사람에 대하여 『조선왕조실록』 세조 3년(1457) 9월 16일에
‘잔질(殘疾)·독질(篤疾)로서 더욱 의탁할 곳이 없는 자와 맹인(盲人)을 위해서는 이미 명통사(明通寺)를 설립하였고, 농아(聾啞)와 건벽(蹇躄) 등의 무리는 한성부(漢城府)로 하여금 널리 보수를 찾고, 동·서 활인원에서 후히 구휼하되, 매 절계(節季)마다 계문하게 할 것.이 사항을 해당 관사에 알리도록 하라.”하였다.’
에서 알 수 있듯이 명통사를 세워 책임을 지도록 한 것이다. 건벽은 다리를 절름거리는 사람을 일컫는다.
이밖에 세종 때 허조는 굽은 장애우(이른바 곱추)로 우의정과 좌의정을 지냈으며,
숙종 때 우의정이었던 윤지완은 한쪽 다리를 절단한 지체 장애우이며,
영조와 정조 때의 화가인 최북도 시각 장애우였다.
그러므로 조선시대에는 신체 장애가 벼슬을 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었으며,
백성들의 장애에 대해서는 나라에서 특별히 관심을 기울였다.
흉년이나 자연재해로 살기 어려울 때에는 먼저 이들 장애우들을 구휼하도록 했으며,
동서활인원이나 제생원같은 곳에서 치료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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