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문화사전/역사뉴스

부민관 폭파의거

윤의사 2020. 3. 3. 19:59

대동아전쟁이 한창이던 19457,

일본은 마지막 발악을 했다.

민족말살정책과 함께 병참기지화정책을 추진하면서

한반도의 우리 민족은 밥 먹는 숟가락까지

공출당하는 처지였다.

그리고 한민족의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행사가 열렸다.

친일부역자 박춘금 일당이 아시아 민족 분격대회을 개최하여

대동아전쟁의 당위성과 한민족이 일선동조론에 따라

전쟁에 참여해야 한다고 참전을 독려하는 연설을 하였다.

조선의 마지막 총독인 아베까지 참석하였다.

1945724일 대한애국청년당 소속의 강윤국, 조문기, 류만수의사는

부민관에 와서 보니 침략자와 매국노를 죽일 절호의 기회라 생각했다.

공사장에서 다이너마이트를 구한 세 사람은

단상을 올라가는 계단과 무대 아래에 폭탄을 설치했다.

3분 후에 터지도록 설치한 시한폭탄이었다.

세 사람은 폭탄 설치 후 재빨리 현장을 빠져나와

오늘날 시청 자리에서 현장을 지켜보았다.

폭발과 함께 부민관은 엉망이 되었으며,

일본 식민지 하에서 일어난 마지막 의거였다.

일경은 현상금까지 걸고 잡으려고 했으며,

억울하게 600명이 고문을 당하였다.

2008년에 세상을 떠난 조문기선생은

독립유공자 서훈도 신청하지 않았으며,

광복절 행사장에는 세상보기가 부끄럽다

며 숨어버렸다.

조문기 선생은 자신을 비롯한 독립유공자에게

세 가지 죄가 있다고 했다.

 

통일을 위해 목숨을 걸지 못한 것,

친일청산을 하지 못한 것,

그런데도 대접을 받고 있는 것

 

이라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후손으로 부끄러울 뿐이다.

부민관은 1935년 경성부가 현재의 서울시의회 자리에

경성부민관이라는 다목적 회관을 세워

모윤숙과 이광수 등 친일파들이 대동아전쟁에 참전을 독려하는

연설을 하거나 전쟁 미화 연극 등을 공연하던 장소였다.

부민관은 미군정사무실, 국회, 시민회관 등으로 사용되다가

서울시의회로 사용되고 있다.



부민관의 모습(독립기념관)

좌로 부터 강윤국, 조문기, 류만수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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