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옛길/영남길

죽주산성과 송문주장군

윤의사 2019. 5. 25. 19:50

죽주산성은 안성시 죽산면 매산리에 있는 산성이다.

고종 23년(1236)에 죽주방호별감 송문주장군이 몽골군과 15일간

격전을 벌인 끝에 승리한 산성이다.

몽골군이 여섯 차례 침입한 고려에서 처인성 전투와 함께 고려군이 승리한 대표적인 전투였다.

죽주산성은 조선시대에도 한양에서 영남으로 갈 때

추풍령과 죽령으로 갈라지는 분기점으로 교통의 요지이면서 전략적 요충지였다.

죽주산성은 내성, 중성, 외성 등 3중 성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성은 조선시대, 중성은 신라시대, 외성은 고려시대 등으로 추정되고 있다.

전체 둘레는 약 1688m이고 원래 높이는 6∼8m(내성 및 복원 성벽은 2.5m 내외) 정도이다.

죽주성 싸움을 승리로 이끈 송문주장군은 고종 18년(1231)에 귀주성에서

몽고군의 공격을 물리치는 데 공을 세웠다.

고종 23년(1236)에는 죽주방호별감이 되어,

몽골군이 죽주산성을 공격하자 15일 동안을 싸워 끝내 적을 물리쳤다.

죽주산성의 승리는 귀주성싸움을 바탕으로 작전을 세웠기에

주변 사람들은 송문주장군을 '신명(神明)'이라 불렀다.

이 공으로 좌우위장군(左右衛將軍)이 되었다.

영남길 8코스에 위치한다.

 

죽주성의 모습, 옛날에 일찍이 과부가 된 홀어머니 밑에 두 남매가 살고 있었습니다. 두 남매는 성장해 가면서 보통 사람에게 찾아볼 수 없는 비범함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아 있는 그들을 사람들은 장사 남매'라고 불렀습니다. 남동생이 열여섯 되던 해, 나라에 큰 전쟁이 나서 전쟁터로 나갔으나 패하고 도망쳐 왔습니다. 이를 용납할 수 없었던 누나는 자결을 권했습니다. 동생은 후일을 위해 집으로 돌아온 자신의 행동에 억울함을 호소하며 자결을 위하여 칼을 빼어들었습니다. 누나는 이것이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냥 용서해 줄 수는 없었습니다. 대신 내기를 해서 이기면 살고 지면 죽을 것이라는 약속을 하였습니다. 일주일동안 누나는 죽산에 산성을 쌓고, 남동생은 나막신을 신고 송아지를 끌고 임금님이 계시는 도성까지 다녀오는 것이었습니다. 내기를 시작하고 여섯째 되던 날 누나는 벌써 성을 거의 다 쌓고 서남쪽으로 여섯 자 정도만을 남겨두고 있었습니다. 이를 지켜본 어머니는 대를 이을 아들을 살리기로 결심하고 뜨거운 팥죽을 쑤어 딸에게 먹여 시간을 지연시키고자 하였습니다. 무더운 여름에 뜨거운 팥죽을 먹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팥죽을 먹으며 천천히 성을 쌓는 사이에 동생이 돌아왔고, 내기에 진 누나는 약속대로 자결하였습니다. 누나가 자결하자마자 몸에서 세 마리의 파랑새가 날아올랐고 후에 남동생은 훌륭한 장수가 되어 나라에 크게 공헌하였다고 전합니다.(경기문화재단 인용)

 

 

송문주장군 영정
송문주 장군 사당 충의사
왕건의 상이 봉안되었던 진전사원 봉업사 당간지주

 

삼죽면 태평 미륵불과 5층석탑, 안성은 과거 팔만구암자가 있었다고 할 정도로 불교문화가 발전하였는데, 특히 미륵이 많아 ‘미륵의 고장’이라고도 불렸습니다. 안성 전역에 약 16구의 미륵이 분포하는데 이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미륵이 있는 도시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매산리석불입상은 고려시대 몽골군의 침입을 물리친 송문주 장군과 김윤후 장군의 명복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이라고 전해집니다. 이 미륵은 태평미륵이라고도 부르는데, 이곳에는 중앙관리들의 출장 시 숙소를 제공하던 역원(驛院)인 태평원(太平院)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과거 이 미륵을 보호하고 있는 용화전(龍華殿) 지붕에는 조선시대 국가에서 관할하는 원찰에서나 올릴 수 있는 아주 귀한 물건이었던 청기와가 두 장 올려져 있었는데 1930년경 누군가가 훔쳐갔고 최근에 한 장의 청기와가 다시 올려졌다고 합니다. 태평미륵의 수인(手印)을 보면 오른손은 두려움을 없애 준다는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왼손은 중생의 모든 소원을 들어준다는 여원인(與願印)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는 모든 두려움을 없애고 소원을 들어 주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태평미륵을 찾고 있습니다. 또한, 미륵불의 돌을 갈아 먹거나 돌을 떼어 삶아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말이 전해지는데, 실제로 미륵불 허리 뒤에 돌을 떼어 낸 흔적이 남아 있어 기자(祈子)신앙의 흔적을 엿볼 수 있습니다.(경기문화재단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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