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인물사/근,현대사 영웅만들기

천재 무용가 최승희

윤의사 2019. 4. 13. 20:35

무용가 최승희는 안막과 결혼하였다.

안막은 이화, 김남천 등과 잡지 집단, 군기를 펴냈고, 일본 경찰은 국민들을 선동했다고 체포했다. 남편이 감옥에 있음에도 최승희는 지방 순회 공연을 하면서 말이 없는 무용으로 항일 의식을 고취했다. 그러나 안막이 일본 경찰에 체포된 이후에 관객도 줄어들고, 일본의 감시로 제대로 공연을 하기가 어려워졌다. 이때 안막이 혼인으로 중지했던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자, 최승희도 남편의 뒤를 이어 일본으로 건너가 무대를 일본으로 옮겼다. 먼저 일본으로 건너왔던 안막은 자신의 공부를 뒤로 한 채 최승희를 돕는 일에 앞장섰다. 그녀는 흰옷 차림에 갓을 쓴 조선의 풍류객을 능청스럽게 표현한 에헤라 노아라라는 무용으로 스타가 되었다. 안막은 최승희의 춤을 세계에 소개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19371219일에 미국을 비롯해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멕시코, 페루, 브라질, 우루과이 등을 3년을 돌며 150여회에 이르는 공연을 하며 세계적인 무용가로 인정을 받았다. 이때 미국에서 동포들로부터 찬조금을 거두어 그녀에게 주니, 일본 정부는 승희에게 경고를 주었다. 최승희는

“3년간의 공연은 천황폐하의 후원으로 가능했습니다. 새삼 감사드립니다.”

라고 신문에 친일적인 발언을 했다.

1937,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최승희는 친일적인 발언을 많이 하게 되었다.

일본인과 조선인은 함께 일어나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야 합니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되자 최승희부부는 중국에 있는 일본군을 위문한다고 명분을 내세워 중국으로 탈출했다.

1945년 독립을 맞이하자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했던 안막은 북한으로 건너갔다. 최승희는 어렵게 귀국선을 타고 1946529일에 인천항에 도착했으나, 친일을 하였기에 비난을 받았다. 그리고 안막의 도움을 받아 고국으로 돌아온 지 2달이 채 못 된 720일에 북한으로 갔다. 최승희는 김일성의 후원으로 무용극 창작에 힘을 기울여 해방의 노래춘향전반야월송곡을 발표하면서 북한에서 예술가로서 최고의 영예인 인민 배우의 칭호까지 받았으나, 1959년 분파 행위자로 지목받으면서 숙청당한 남편 안막의 뒤를 이어 1967년에 북한의 주체 예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숙청되어, 현재 생사는 알 수가 없는 형편이다.

그녀는 우리나라의 전통 무용을 세계에 알린 한국 무용의 개척자이며, 일본의 침략 속에서 시들어가는 우리나라의 전통 무용을 재현하려고 애쓴 장인 정신이 투철한 예술인이었다. 그녀가 친일적인 행동과 북한으로 넘어간 것에 대한 비판은 있을 수가 있지만, 불행한 시대가 만들어낸 상징적인 인물이 된 천재적인 무용가였다.


최승희의 빛을 구하는 사람




최승희의 공연프로그램(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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