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인물사/근,현대사 영웅만들기

대구 기생 염농산

윤의사 2019. 3. 24. 10:15

  1908년에는 경상북도 관찰사로 박중양(朴重陽, 1874-1955)이 부임하였다. 그는 조선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수양아들이었다. 이토 히로부미의 부인이 바다에 빠졌을 때 그녀를 구해주었다. 그럼에도 박중양은 어떠한 사례도 귀한 선물도 사양하였다. 이에 감동한 이토 히로부미가 박중양을 수양아들로 삼은 것이었다. 1900년 관비유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가 공부하면서 친일파로 일본의 대한제국 침략에 앞장선 인물이다.

그는 관찰사로 부임하자마자 대구를 상징하는 역사적인 유적인 대구읍성을 허물고, 읍성의 6개의 문, 관덕정, 영영축성비, 대구부수성비 등과 관리들이 출장을 오갈 때 머물던 태평관까지도 철거하려고 하였다.




대구 달성


고종황제는 분노하였다. 고종의 분노가 대구까지 전해지자 염농산은 후배 기생들을 불러모았다.

얘들아, 지금 황제폐하까지도 반대하는 일을 일개 관찰사가 대구의 역사를 파괴하려고 한다. 우리가 돈많은 사람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 불의가 있으면 그것을 막으려고 당당하게 맞서야 한다.”

염농산은 뜻을 같이하는 동생 비취와 기생들, 그리고 지역주민들과 함께 대구 관아로 가서 학생들처럼 권당(捲堂)을 하였다. 옛날 학생들의 시위를 보통 권당이라고 하였다. 권당이란 공부하는 방을 비우는 것이니 오늘날 교실에서 거리로 뛰쳐나간다는 뜻이다. 권당은 서당(書堂)이나 승당(僧堂), 사학(四學), 성균관 등의 학생들이 일으켰다.

 염농산과 기생 및 지역주민들은 호곡권당을 하였다. 호곡권당은 학생들이 대궐 문앞으로 가서 함께 아이고!아이고!”하면서 울어대는 것이다

아이고! 아이고!”

황제폐하의 명령도 거부하는 관찰사가 웬 말이냐?”

호곡권당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나자 박중양은 당황하였다.

이것들을, 내 말을 거역하는 저것들을 쫓아내라. 만약 명령을 거부하는 자들은 당장 감옥에 가두거라.”

이토 히로부미를 등에 업고 박중양은 염농산과 비취, 지역주민들을 총으로 위협하며 쫓아냈다. 그리하여 박중양의 뜻대로 대구를 상징하는 읍성을 비롯한 건축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염농산은 대구 관기에서 독립을 하여 달성권번의 으뜸 기생이 되었다. 후배기생들의 선생님이 되어 가르침을 주면서 생활하고 있었다. 한가한 오후에 염농산에게 급박한 소식이 전해졌다. 그녀가 자란 성주군이 물바다가 되어 엉망진창이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원래 성주군은 산으로 둘러쌓인 분지이다. 하지만 용암면은 두리방천을 끼고 발달한 충적평야가 10km에 이를 정도로 넓다. 이곳에서 벼농사를 지으며 평화롭게 살던 주민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홍수와 가뭄이다. 봄에 가뭄이 들면 모내기를 해야 하는데 모내기를 하지 못하니 힘들고, 모내기를 한 후 7월에서 9월에는 홍수가 와서 애써 지어놓은 농사를 몽땅 망쳐버리기 일쑤였다.

이 소식에 염농산은 용암면에 사람을 보냈다. 면장을 찾아 3,000원을 선뜻 내놓았다. 3,000원은 오늘날 30억원에 달하는 큰 돈이었다.

우리 행수 어른이 이 돈으로 두리방천의 제방을 높이 쌓아 홍수를 막고, 가뭄에는 물을 저장할 수 있는 저수지 역할도 할 수 있도록 하랍니다.”

면장은 깜짝 놀랬다.

아니, 너의 행수가 누구더냐?”

달성권번의 행수기생인 염농산입니다.”

장하구나. 자네 행수에게 꼭 전하게나. 이 돈으로 우리 용암면 농민들이 신천지를 만들 것이라고...”

염농산이 거액을 내놓아 제방을 쌓으라고 했다는 말에 용암면 주민들은 팔을 걷고 너도 나도 제방 쌓는 일에 나섰다. 그리하여 홍수가 나도, 가뭄이 들어도 농민들은 걱정없이 생활을 하게 되었다.

제방이 완성되던 날,

염농산은 음식을 만들어 그동안 고생한 농민들을 위로하였다. 그리고 학춤을 추면서 축하해주었다. 농민들은 염농산을 칭찬하며 함성을 질렀다.

행수어른, 고맙습니다.”

행수어른, 감사합니다.”

나라에서 못하는 일을 행수어른께서 해주셨습니다.”

<염농산 제언 공덕비>는 염농산이 두리방천을 쌓은 공덕을 기념하며 세운 비석인 것이다.


성주 염농산 공덕비


지금도 사람들은 성주군 용암면 두리방천 복구로 생긴 너른 들판을 "새내(新川)"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나이가 드신 분들은 "앵무들"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달성권번으로 돌아온 염농산은 판소리를 연구하였다. 우리나라 판소리는 12마당이 전했으나, 고종 때 전라북도 고창에 사는 신재효가 여섯 마당으로 정리하면서 제자들을 키워내고 있었다. 여섯 마당은 춘향가, 심청가, 박타령, 토끼타령, 적벽가, 가루지기타령이다. 사실상 대구는 판소리를 배우기가 어려웠다. 그럼에도 워낙 음악성이 뛰어난 염농산은 대구를 영남지방의 판소리 중심지로 만들었다. 그녀의 제자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이 명창 박녹주(朴綠珠, 1905-1979)이다. 박녹주명창은 14세 때인 1918년 대구로 내려와 염농산한테 춤과 시조, 노래를 배웠다고 한다.

사람들이 모두 잠들면 가끔 낯선 사람이 염농산이 머무는 달성권번의 담을 넘곤 하였다.

얼굴을 가린 한 남자가 달성권번 주위를 맴돌았다. 주위에 사람이 없음을 안 남자는 담을 훌쩍 뛰어 넘었습니다. 그리고 염농산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많이 익숙한 발걸음이었다.

방으로 들어서자, 남자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보자기를 풀었다.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입니다."

"신세를 지러왔습니다."

"그런데 왜 얼굴을 가리고 나타나십니까?"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제가 가고 난 뒤에 도둑이야! 라고 하셔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염선생님께 일본 경찰이 독립운동에 필요한 돈을 대준다고 죄를 뒤집어 씌울테니까요?"

그는 바로 상하이 임시정부의 책임자인 김구선생의 심부름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구하러 온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달성권번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구해가는 것이 일본 경찰에 알려질까 도둑으로 변장하고 왔던 것이다.

염농산은 장롱 깊숙히 감춰놓았던 돈과 금을 꺼내 독립운동가에게 주었다. 언제나 그는 자신이 준 돈의 반만이라도 김구선생에게 전해져 우리나라가 독립하는데 필요한 돈으로 쓰여졌으면 했습니다.

독립운동가는 고맙다는 말을 마치고 담을 뛰어넘은 것을 확인한 염농산이 소리쳤다.

도둑이야!”

그러자 달성권번의 사람들이 자다가 일어나 모두 몽둥이를 든 채로 염농산에게로 달려왔다.

행수어른, 어디로 달아났습니까?”

저기! 저기로!”

염농산은 독립운동가가 뛰어넘은 담의 반대를 가리켰다. 염농산의 말에 따라 사람들은 모두 그가 가르쳐준 방향으로 뛰었다. 일본 경찰도 달성권번이 도둑을 맞았다고 생각을 하였다. 그러므로 염농산은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을 보내는 비밀창구 역할을 하기도 했던 것이다.
한편 염농산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 바로 자라나는 청소년들을 교육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대구에서 역사가 오래된 사립학교인 교남학교가 돈이 없어 학교문을 닫을 지도 모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교남학교 인근에 살고 있던 주민들은 교남학교 살리기 운동을 벌였다. 성금을 모으며 학교를 살리려 애썼지만 학교를 살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염농산은 교남학교에 사람을 보냈다.

학생들에게 나라를 되찾을 방법을 알려주셔야 됩니다. 그래서 저희 행수어른께서 이것을 갖다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염농산의 심부름을 온 사람이 커다란 봉투를 내놓았다. 교남학교 교장선생님은 봉투를 받아 열어보았다. 봉투 안에는 자그만치 2만원이 들어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약 200억에 해당되는 큰 돈이었다.

이렇게 큰 돈을 어떻게?”

교장선생님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행수어른께서는 나라를 되찾는 길은 오직 청소년 교육뿐이라는 생각 뿐이십니다. 교장선생님께서 행수어른의 뜻을 잘 전달해주셨으면 합니다.”

뭐라도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된 사람을 길러내기위해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염농산을 비롯한 교남학교에 기금을 낸 사람 덕분에 위기에 몰렸던 교남학교는 대구를 대표하는 고등학교인 대륜고등학교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 소식을 신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염농산 김울산 두 여사가 교육사업에 몸을 던져 만장부가 하지 못한 일을 능히 함으로써 수전노 제씨의 심장을 자극하고 있다'

광복 이듬해인 1946, 앵무들 한 연못에 한 마리의 학이 춤을 추면서 물속에 들어가는가 싶더니 하늘 높이 올라가 사라졌다. 염농산이 두리방천의 제방을 쌓고 좋아서 학춤을 추었던 곳에서 멀지 않은 연못이었다. 용암면 주민들이 이상하게 여겨 가보니 염농산이 흰옷을 입고 물에 빠져 있더라는 것이었다. 용암면 주민들은 염농산을 추모하며 장례식을 치르면서 인근 야산에 고이 묻어 주었다. 그녀 58세 때의 일이었다. 무덤은 비록 초라했지만 용암면 주민들은 영원히 잊지 못할 '앵무미()'로 기억하고 있다.


춤으로 승화되어 공연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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