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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윤의사 2016. 3. 15. 08:05

() 원제(元帝) 건소(建昭) 원년(BC38), 전국에 명령을 내려 후궁을 모집하였다. 18세의 완소군(본명:왕장)도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황제는 수천 명에 이르는 후궁들의 모습을 알 수가 없어 모연수를 비롯한 화공들에게 초상화를 그리게 하였다. 집안이 넉넉한 후궁들은 화공들에게 뇌물을 주면서 예쁘게 그려달라고 했지만, 집안이 어려운 완소군은 그럴 수가 없었다. 결국 황제의 성은을 얻지 못하게 되었다.

원제 경녕(竟寧) 원년(BC33), 남흉노의 호한야(呼韓邪) 선우가 많은 공물을 가지고 원제를 찾았다. 크게 기뻐한 원제는 선우를 부마가 되겠다고 했다. 원제는 선우의 청을 받아들이고, 한나라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 크게 잔치를 베풀었다. 이때 황제의 성은을 입지않은 후궁들을 잔치에 불렀다. 잔치가 벌어지는 동안 선우는 한 여인에 혼이 빠지고 말았다. 선우는 원제에게 공주 대신 후궁들 중 한명과 혼인하겠다고 하였다. 원제가 승낙하니, 선우는 완소군을 택하고 말았다. 완소군의 모습을 본 원제도 그만 반하고 말았다. 원제는 초상화를 다시 조사하니 전혀 다른 모습에 화가 나 모연수를 비롯한 화공들을 참수하였다. 그리고 선우에게 혼수를 준비해야 하니 3일의 여유를 달라고 하였다. 그리고 완소군을 미양궁으로 불러 3일간 밀애를 나누었다. 3일 후 원제는 소군의 칭호를 내렸다.

완소군은 흉노족들에게 길쌈을 가르치며 한나라와 우호에 힘썼다. 그러나 호한야 선우가 죽자, 완소군의 미모에 반한 아들 복주루 선우가 왕비로 삼으려 하였다. 이에 완소군이 한나라 성제에게 귀환을 요청했으나 흉노의 풍속에 따르라 하였다. 결국 복주루 선우의 왕비로 살다가 죽어 대흑하 남쪽 기슭에 묻혔다. 그러나 그의 묘의 풀은 항상 푸르러 청초(靑草)’라 불리워졌다.

왕소군(王昭君)의 슬픈 사연을 노래한 당()나라 시인 동방규의 시 소군원에서 춘래불사춘이 유래했다.

 

()나라 국운 처음에는 융성했으니
조정에는 무신도 넉넉했다네
어찌 꼭 박명한 여인이
괴로움을 겪으며 먼 곳까지 화친하러 가야 했던가

漢道初全盛
朝廷足武臣
何須薄命妾
辛苦遠和親

흐르는 눈물 가리고 단봉성을 떠나
슬픔을 삼키며 백룡대로 향하네
선우(單于)는 놀라 기뻐했으나
더 이상 옛날의 그 얼굴 아니었다네

掩涕辭丹鳳
銜悲向白龍
單于浪驚喜
無復舊時容

오랑캐 땅엔 꽃도 풀도 없어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구나
옷에 맨 허리끈이 저절로 느슨해지니
가느다란 허리 몸매를 위함은 아니라오

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
自然衣帶緩
非是爲腰身

동방규(東方) 소군원(昭君怨)삼수(三首)>

 

정치인들 사이에서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을 쓰는 경우가 있다.

처음 이 말을 쓴 정치인은 김종필 전국무총리이다. 12.12 사태 이후 정치의 봄을 맞이하려던 대한민국에 전두환 전대통령 일파가 정권을 잡으면서 했던 말이다.

다음으로 노무현 전대통령이 썼다. 2004년 탄핵을 받고, 청와대 뒤산을 오르며 한 말이다.

이번에는 여당의 김무성대표가 썼다.

그러나 지금처럼 계파 정치 중심의 한국에서는 정치인들에게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 있을 수밖에 없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는 계파 정치를 청산하고 오직 국민을 바라보는 정치를 해야만 한다.

이제 4.13총선이 한 달도 남지 않았다. 정치인들은 계파의 우두머리를 바라보는 것이 아닌 오직 국민을 바라보는 정치인이 되어야만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을 느끼지 않는다. 우리 국민들도 계파를 보고 투표하지않고 오직 국민을 섬기는 정치인을 뽑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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