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문화사전/우리역사문화사전

왕손의 태는 왕릉처럼 관리했다.

윤의사 2011. 7. 29. 16:41

어머니와 아기의 호흡과 온기를 느끼게 해 주는 것의 하나가 태(胎)이다.

즉, 탯줄은 모체의 태반과 태아의 배꼽을 잇는 끈 모양의 것으로

제대(臍帶)라고도 한다.

민간에서는 이 탯줄을 마당에 왕겨 등 땔감 속에 넣어 태우는데

모두 탈 때까지 이 장소를 떠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도 태가 정력에 좋다느니 하여 팔기도 하지만,

옛날에는 간질병이나 정신병에 특효약이라 하여 훔쳐가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임금과 왕자, 공주 등 왕손의 태는

전국에 산재해 있는 명당 자리를 골라 안장하여

왕릉 못지않게 신성시하며 보살펴 왔다.

이를 태실(胎室), 태봉(胎封)이라고 했다.

왕실에서 아기가 태어나 삼을 가르면(아기의 탄생을 가리킴),

태실도감(胎室都監)을 임시로 설치하고 사흘 후에 태씻이,

곧 세태(洗胎)를 한다.

백 번을 씻은 그 태를 흰 항아리 바닥에 동전 한 닢을 깔고 담는다.

그러고는 남색 비단으로 항아리를 봉하고 붉은 끈으로 단단히 맨 뒤

이 속항아리를 보다 큰 겉항아리에 담는다.

부딪침을 완화해 주기 위하여 그 겉과 속의 틈새를 감당(甘糖) 한 근으로 밀봉을 하였다.

태를 묻을 태봉이 정해지면 태를 묻는 안태(安胎)를 하는데,

안태사를 비롯한 30~40명의 고관들이 군악대를 앞세우고

성대하게 의식을 베풀고 대석(臺石), 전석(磚石), 우상석(湡裳石),

개첨석(蓋檐石) 등의 석물로써 화려하게 장식을 했던 것이다.

이렇게 태실을 중요시한 것은 왕실의 번영과 왕손의 안녕,

나아가 국가의 운명까지 좌우할 수 있다는 사상 때문이다.

그래서 이 태실이 한 고을에 생기면 이 고을의 격이 한 등급 오르는가 하면, 태실 관리를 소홀히 했거나 태봉산에 산불이 나거나 하면

그 관할 고을 수령을 좌천시켰다.

그런데 태실의 내용물을 어떤 방식으로든지 복용하면

그 태실의 주인공처럼 사내 아이를 낳는다는 생각이나,

과거에 급제하려는 선비가 태실의 주력(呪力)을 입으면

급제한다 하여 수난을 당하기 시작하더니,

임진왜란 때와 한말에 침략한 일본인들이 태실의 도자기에 관심을 가져

이 태항아리도 도굴해 가 훼손을 더하게 하였다.

더욱이 경기도 고양시에 위치한 서삼릉에는 53기의 태실이 함께 모셔져 있는데, 문화재의 도굴과 한국인의 정신적 지주라 할 삼신 신앙을 없애려는 목적에서 이것을 파괴했다.

지금도 각 지역의 명칭 중에 태봉(胎峰), 태산(胎山)이니

태봉지(胎封地)라는 곳은 조선시대에 태실이 있던 곳으로 여겨진다.

아래 그림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진입니다.

 

 

 

 

'우리역사문화사전 > 우리역사문화사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옛날에도 UFO가 있었나요?  (0) 2011.08.25
어처구니  (0) 2011.08.07
임금의 변은 매화  (0) 2011.07.24
옛날 사람들의 바캉스는?  (0) 2011.07.22
삼복 더위의 보양식  (0) 2011.07.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