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교 지도자이자 독립 운동가
종교와 교육 사업으로 독립을 위해 힘쓰다가, 다른 민족 지도자들과 함께 최대 규모의 한민족 독립 운동인 삼일 운동을 일으켰다. 일본의 탄압으로 실패하였지만, 민족혼을 일깨워 우리 민족을 하나로 묶는 계기를 이루었다. 본명은 응구, 호는 의암이다.
손병희는 어렵게 자라 어려서부터 불쌍한 처지에 놓인 이들을 도우려는 마음이 강했다. 그는 1882년에 동학을 알게 되었고 이듬해부터 최시형의 바로 밑에서 고된 수행을 하였다. 손병희는 처형당한 교조 최제우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달라는 교조 신원 운동을 여러 차례 적극적으로 벌였다.
뒤이어 전봉준이 주도하는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최시형을 도와 동학군 10여만 명을 이끌고 참여하였다. 그러나 무주, 진안 등에서 일본군과 관군에 맞서 싸우다가 패하여 강원도 쪽으로 몸을 숨겼다. 이때부터 손병희는 최시형에 이어 제3대 교주가 되어 동학을 이끌게 되었다.
동학을 천도교로 바꾸고 교육 활동에 힘쓰다
동학농민운동이 진압된 뒤에 손병희는 숨어 지내며 포교 활동을 하다가 망명길에 올랐다. 그는 일본과 중국 상하이를 떠돌다가 잠시 귀국하여 일본으로 유학생들을 데려가기도 하였다. 나아가 손병희는 국내로 이용구를 들여보내 동학교도를 중심으로 진보회를 만들어, 민족 의식을 키우고 서양의 발달된 문화를 받아들이는 개혁 운동을 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용구가 친일파인 일진회와 손을 잡는 바람에 진보회는 친일 단체로 탈바꿈하고 말았다.
손병희는 일본에서 소식을 듣고 바삐 귀국하여 동학의 이름을 천도교로 바꾸고, 이용구를 교단에서 내쫓았다. 한편 손병희는 망명 생활을 통해서 민족의 독립 정신을 키우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교육이라는 것을 개달았다. 그리하여 보성 학원과 동덕여자의숙을 인수해 운영했을 뿐만 아니라 많은 학교에 운영비를 대주었다. 또 출판사인 보성사를 세워 민족을 계몽시키는 책들을 펴냈다.
삼일 운동을 통해 자주 독립을 되찾으려 하다
손병희는 1918년 말부터 종교계를 중심으로 이승훈, 한용운 같은 민족 지도자들과 함께 세계 정세의 변화를 지켜보면서 독립 운동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1월에는 독립 운동을 백성들과 함께 하고, 일원화하고, 비폭력으로 한다는 원칙을 정하였다.
이즈음 고종 황제가 일본에 의해 독살당하고, 동경 유학생들이 2.8 독립 선언을 발표하자, 독립에 대한 민족의 열망은 더욱 커졌다. 이에 2월 27일에 독립선언서 2만여 장을 천도교에서 운영하는 보성사에서 찍고, 3월 1일 정오에 손병희를 비롯한 33명의 민족 대표가 태화관에서 독립을 선언한 뒤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손병희는 이 일로 감옥에 갇혔다가 병을 얻어 풀려났으나, 얼마 안 가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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