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과 박물관/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

의사님이 마지막 밤을 보낸 가나자와성

윤의사 2023. 12. 13. 14:03

상하이 홍커우 의거가 일어난 지 한 달도 안된 525,

상하이 파견군 군법회의에서 봉길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었다.

방청인도, 기자도 없는 엄숙하면서도 무거운 분위기에서 재판이 진행되었다.

군법회의는 단심제였기에 봉길에게 내려지는 판결은 최종적인 것이었다. 재판관이 봉길에게 말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느냐?”

너희들은 나를 재판할 자격이 없다. 이제 내 목숨을 빼앗을 수는 있지만, 나는 지하에서 일본이 망하는 날까지 계속 싸울 것이다.”

봉길의 말이 끝나자 재판관이 판결문을 읽었다.

피고인 윤봉길, 살인·살인미수·폭발물 단속·법칙 위반 등 피고 사건에 대하여 사형을 선고한다.”

이미 예견한 듯 봉길은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봉길의 사형선고 다음 날인 526일에 기쁜 소식이 들려왔다.

바로 봉길이 폭탄을 투척한 목표 중 한 명인 시라카와대장이 죽었다는 소식이었다. 봉길의 의거는 성공한 것이었다.

 

사형을 선고받은 봉길에 대한 집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528일에는 상해파견군사령관대리의 명령으로 집행이 당분간 연기되었다. 일본은 김구를 유인해 체포하기 위해 봉길의 사형집행을 미루었던 것이다. 김구는 홍커우 의거가 있는 후에 일본 헌병들이 조선인들을 아무 죄도 없는데 잡아가자 자신이 윤봉길군과 함께 일을 도모했다고 발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인들의 협조로 김구는 일본 헌병들이 체포할 수가 없었다. 봉길은 감옥에 있으면서 면회도 할 수가 없었으며, 외부와 단절된 채 시간을 보내야 했다. 예산 시량리의 가족들은 일본 헌병들의 감시와 협박을 받으며 어려운 생활을 해야만 했다.

봉길의 의거 이후 중국과 일본이 정전협정을 맺으면서 일본군의 대부분이 귀국하게 되었다.

11월에는 일본 헌병대도 귀국하게 되었다.

봉길도 귀국하는 일본 헌병대와 함께 1118일 일본 우편 수송선인 다이요마루(大洋丸)호를 타고 3일간의 항해 끝에 고베항에 도착했고, 오사카로 이동하여 위수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때도 면회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봉길이 어떻게 지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1217일 밤, 삼엄한 경비 아래에 봉길은 오사카에서 가나자와의 제9사단 형무소로 옮겨졌다. 9사단장은 바로 홍커우 공원에서 중상을 당한 우에다 중장이었기에, 이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함이었다. 봉길은 이제 생이 얼마남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고 기도하면서 한숨도 잘 수가 없었다.

잠을 이루지 못하며 뒤척이는데 감방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19321219일 오전 6시였다.

봉길은 무장한 헌병들과 함께 형무소를 나섰다. 7시가 넘어 미고우시 공병작업장에 도착하였다.

총살형을 집행할 10명의 헌병과 집행관이 긴장하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네모토 검찰관이 봉길에게 말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느냐?”

아직은 힘이 없어 외세의 지배를 받지만 머지않아 독립은 실현될 것으로 믿는다. 대한 남아로 할 일을 하고 미련없이 떠나가오.”

봉길은 십자로 된 형틀에 묶였다. 그리고 봉길의 눈을 가리고 바닥의 거적에 무릎을 꿇렸다.

740, 요란한 총소리와 함께 봉길은 한국 독립운동사에 영원히 남을 의혈남아로 미소를 남기며 생을 마쳤다.

(스푼북 발행, 민병덕의 <매헌윤봉길의사>에서 발췌)

9사단이 자리했던  가나자와성
가나자와 성벽
9사단 헌병대 터, 지금은 가나자와성을 소개하는 박물곤으로 바뀌었다.
의사님이 마지막 밤을 보낸 구금소터, 지금은 일본놈들이 의사님의 숭고한 뜻을 평가절하하려고 화장실로 사용하고 있어 가슴이 아팠다. 또한 가나자와성을 다녀온 한국인들이 이 건물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점이 너무나 아쉬웠다. 한일관계가 좋아져 이 건물을 복원하고 설명문이 추가된다면 이곳을 방문하는 한국인들에게 감동을 줄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