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동쌤의 역사 속의 오늘은?

8월 20일 오늘의 역사, 남북 적십자 대표, 분단 후 판문점에서 첫 회의

윤의사 2023. 8. 20. 14:18

1971820, 남북 적십자 대표들이 분단 이후 처음으로 판문점에서 회의를 가졌다. 군사정전위원회는 남북한이 회의를 했지만, 이산가족의 만남을 위한 민간 기관의 만남은 분단 이후 처음이었다.

1971812일 대한적십자사 최두선 총재는 특별성명을 통해 남북이산가족들의 비극은 금세기 인류의 상징적 비극이라고 하면서 남북통일이 단시일 내에 이루어지기 어려운 현실하에서 적어도 1000만 이산가족들의 실태를 파악하고 소식을 전해 주며 재회를 알선하는 가족찾기운동만이라도 우선 전개할 것을 북한에 제의하였고, 북한은 814일 이를 받아들여 판문점에서 예비회담을 개최하기로 합의하였다.

1971820일부터 916일까지 남북적십자회담 개최를 위한 사전 접촉으로 판문점에서 5차례의 파견원 접촉이 이루어졌다.

접촉 결과로 1971920일부터 1972811일까지 남북 적십자 본회담을 개최하기 위한 예비회담을 11개월 동안 판문점 중립국 감독 위원회 회의실에서 쌍방 각 5명씩의 대표가 참가한 가운데 총 25회 개최되었다.

예비회담을 통해 생사 소재 확인 및 통보, 상봉 및 방문, 서신 거래, 가족 재결합, 기타 인도 문제 해결 등 5개항을 의제로 삼아 서울과 평양에서 교대로 회담을 개최함을 결정하였고, 1972829일 평양에서 제1차 남북적십자 본회담이 개최되었다.

서울에서는 1972914일 제2차 남북적십자 본회담이 개최되었다. 처음엔 이산가족 상봉, 생사확인 등을 해준다는 것에 양측 모두 동의하며 분위기가 성숙되는가 싶었지만, 갑자기 북한이 이산가족과 전혀 상관없는 윤기복의 연설에서 김일성 찬양을 들먹이며 정치선전 의도가 드러나 회담의 앞날이 불투명해졌다.

이후 제3차 본회담에서 제6차 본회담까지 북한은 남한의 반공법·국가보안법 철폐, 반공기관 및 반공단체 해산, 반공교육 및 반공 정책 중지 등을 실현 요구하는 '조건환경 개선'과 이산가족찾기운동을 선전할 수만 명의 요해요설인원을 먼저 상대방 지역 이동(里洞) 단위까지 파견하자며 이들에게 언론·출판·집회 등 활동의 자유와, 휴대품에 대한 불가침을 보장할 것을 요구했는데, 이것은 이산가족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아닌, 대한민국 공산화를 위한 정치 공작원을 남파해 적화통일 환경을 조성하기 위함이었다.

7차 본회담(1973.7.10.13. 평양)에서 남측이 교착상태를 돌파하기 위해 시범사업으로 추석성묘 방문단을 상호 교환하자고 제의했으나 북한은 이를 거절하면서, ‘조건환경개선요해요설인원등의 선결조건부터 먼저 해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남북적십자 본회담은 1973828일 북한의 전면적인 무기한 대화 중단 선언과 함께 단절되었다.

북한의 정치선전과 억지 주장으로 남북적십자회담은 일곱 차례나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성과 없이 끝나게 되었다. 특히 서울과 평양을 오가는 회담을 통해 북한은 자신들이 서울에서 환영받을 것이고 정치선전장으로 활용하려고 했으나, 대한민국 국민들이 오히려 김일성 찬양 연설에 분노하자 이후 남북적십자회담은 서울과 평양 교환방 문이 아닌 평양이나 판문점에서의 회담 개최를 주장하였다.

몇 번의 만남을 통해 이산가족이 재회를 했지만 본인의 선친처럼 가슴에 한을 품고 돌아가신 분들이 더 많을 것이다. 이산가족의 한을 풀어드리기 위해서라도 남북한이 전향적으로 임했으면 한다.(사진:통일부 남북회담본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