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동쌤의 역사 속의 오늘은?

오늘은 한말 의병장 허위 피체

윤의사 2022. 6. 11. 11:39

허위(許蔿, 1855~1908)는 경북 선산군 구미에서 출생하였다. 유학에 뜻을 두었으니,

7세 때 달은 대장군이 되고/ 별은 만 병이 되어 따르도다.”

꽃을 꺾으니 손에 봄이요/ 물을 길으니 달빛이 문안에 드네라는 시를 짓기도 했다.

허위는 1896326일 김천 장날을 기해서 이기찬을 의병대장에 추대하고 자신은 참모장이 되어 의병을 일으켰다.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에 항거한 을미의병이었다. 금산군의 금릉에서 무기고를 습격해 무장을 하고,

지례군수를 격파하였으나 공주와 대구의 관군에 패퇴하였다.

패전군이었으나 허위는 남은 의병을 모아서 계속 항전을 하다가 고종의 밀지가 내려 의병 해산을 하였다.

의병 해산 이후 잠시 관직에도 있으면서 항일 언론가인 장지연 등과 교류를 하면서 신학문도 공부하였다.

1907년 고종의 퇴위와 군대해산이 이루어지자, 9월 허위는 연천, 철원 등지에서 해산된 군인들을 합류시켜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이인영과 김규식 등의 의병부대와 연합을 하여 전국의병의 연합체인 13도 창의군을 조직하였다.

13도 창의군은 서울진공작전을 세웠다. 이때 이인영의 이름으로 전국 각지와 해외동포에게 보내는 격문까지 발송하였다. “해외동포에게 보내는 격문의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동포 여러분,

우리는 일치단결하여 조국에 몸을 바쳐 우리의 독립을 회복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또 야만 일본인의 잔혹한 만행과 불법행위를 전 세계에 호소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교활하고 잔인하여 진보와 인간성의 적입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하여 모든 일본인과 그 주구들과 야만적인 군대를 격멸하는데 힘을 모아야 할 것입니다.

 

이인영의 호소격문에 전국에서 의병이 모여 무려 1만 명에 이르렀다.

이인영과 허위는 양주에 13도 창의대진소를 세우고 이인영을 대장으로, 허위는 경기와 황해도 창의대장을 맡았다.

그러나 이때 이인영이 부친의 부고를 받고 급히 문경으로 가게 되었다. 이인영은 허위에게 전권을 주어 13도 창의군의 총대장을 맡았다. 19081월 말 허위는 300명을 이끌고 서울 동대문 앞 30리까지 진격했으나,

후속부대의 지원이 오지 않은 가운데 일본군의 집중 공격으로 패하게 되었다.

허위는 다시 임진강과 한탄강을 중심으로 의병항전을 계속하였다.

1908421일에는 전국적으로 군사를 일으켜 항일운동을 펼칠 것을 호소하면서 통감부에 30여 개의 조건을 요구하기도 했다. 서울 주재 각국 영사관에 통문을 보내 일제의 불법적인 침략상을 호소했다. 그러나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1908611일 일본군 헌병에게 잡혀 영평군 유동에서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 뒤 허위는 918일 사형을 선고받고, 1021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1호로 교수형을 당하였다.

1915년 허위의 제자인 박상진이 대한광복회를 결성하고 총사령에 추대되었다.

광복회는 친일파 암살과 군자금 모금 등을 목적으로 결성된 독립운동 단체였다.

박상진은 스승의 뜻을 계승하고자 했으나 어머니의 죽음 소식에 집으로 귀향하다가 일본 경찰에 피체되어 죽음을 당했다.

 

창의대진소의 서울진공작전은 실패했으나 의병전쟁사에 큰 의의를 가지고 있다.

먼저 전국적인 연합의병부대로 최초로 조직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당시 각지의 의병부대는 독자적인 항일전을 전개하면서 일본군의 진압은 손쉬웠다.

이러한 분산적인 활동이 나라를 되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연합작전은 의병운동이 의병운동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전선 구축과 연계는 이후 의병전쟁으로 승화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셈이다.

의병장 허위
의병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