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동쌤의 역사 속의 오늘은?

오늘은 임오군란 발생

윤의사 2022. 6. 5. 20:05

민씨 정권도 군인 폭동 미수사건을 겪으면서 이들의 불만을 무마시킬 필요성을 느끼고 구식군인들에게 밀린 군료의 일부를 지급하기로 결정하였다. 당시 군인들의 군료는 13개월이나 밀려 있는 상태였다.

18826월 초에 전라도 조미(漕米)가 서울에 도착하였다. 65일에 도봉소에서는 우선 무위영 소속 훈련도감 군인들에게 한 달분의 군료를 지급하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였다. 밀린 군료의 극히 일부이지만 군인들은 그나마 받게 된 것을 다행으로 알고 쌀을 확인하였다. 그 결과, 쌀에는 물에 젖어 썩은 것이 섞여 있을 뿐만 아니라 겨와 모래가 절반이나 되었다. 게다가 양도 반이나 모자랐다. 당시 선혜청 당상으로 있던 민씨 척족의 하나인 민겸호 등이 중간에서 군료를 횡령하고는 농락을 부린 것이다. 군인들은 더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포수(砲手) 김춘영, 유복만 등이 주동이 되어 선혜청 고직(庫直)과 무위영 영관에게 항의하여 시비가 격렬해지자 다른 군인들도 합세하여 도봉소는 순식간에 수라장이 되었다. 그러나 고직 등은 핑게를 댈 뿐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이에 화가 난 군인들은 집단으로 그를 때려눕혔다. 당시 궁중에 있다가 군인들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보고를 받은 민겸호는 포졸들을 풀어 김춘영, 유복만 등 주동자를 체포하여 포도청에 가둔 뒤 혹독한 고문을 가하고 그 가운데 2명을 처형한다고 선포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김춘영의 아버지 김장손과 유복만의 동생 유춘만 등은 69일 통문을 돌려 군인들의 결집을 호소하는 등 구명운동을 펼쳤다. 통문을 본 군인들이 속속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무위영 군인들은 그 혼란 속에서도 지휘 체계를 존중하여 자기들의 직속상관인 이경하를 찾아가 사태를 설명하고 억울하게 잡혀간 군인들을 풀어줄 것을 호소하였다이 자리에서 이경하는 넌지시 민겸호에게 직접 가서 따져보라는 여운을 남겼다.

상관에게 자신들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배신감을 느낀 군인들은 당사자인 민겸호의 집을 찾아가 호소하기로 하고 그의 집으로 몰려갔다. 그러나 민겸호는 집에 없고 경복궁에 있었기 때문에 만나지 못했다. 그의 하수인들이 있었지만 군인들의 요구를 들어줄 리 만무였다. 오히려 모욕적인 대답만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군인들은 끝까지 합법적인 방법으로 김춘영 등에 대한 구원운동을 펼쳤지만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군인들은 더이상 솟아오르는 분노를 억누를 수가 없었다.

마침내 군인들의 폭동은 터지고 말았다. 그들은 먼저 민겸호의 집을 습격하여 때려부쉈다. 민겸호의 집을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은 민씨 정권에 대한 도전과 항쟁을 뜻한다. 실제로 군인들은 폭동을 일으키면서 소리치며 결의를 다졌다.

이왕 죽을 바에야 원한을 풀고 나라를 위하여 거사를 하고 죽자!”

이것은 단순히 군료 문제 때문이 아니라 당대 사회적 모순에 저항하여 폭동을 일으키겠다는 뜻이다. 그들의 다음 행동을 보면 이러한 면이 확연히 드러난다.

민겸호의 집을 쳐부순 폭동군들은 무장을 하기 위해 동별영으로 몰려가 무기고를 공격하여 무기를 접수한 뒤 서울 중심거리인 종로로 나가 시위를 벌였다. 폭동군들은 기세를 몰아 포도청으로 진격하여 투옥되어 있던 동료들을 구하고 정치범들이 갖혀 있는 의금부를 급습하여 조미통상수호조약 체결 이후 강경한 어조로 위정척사를 주장하다가 체포된 백낙관을 풀어주었다. 이러한 행동은 폭동군들이 일본과 미국 등 외세의 침략 행위을 반대한다는 면에서 위정척사론자들과 뜻이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유의 몸이 된 백낙관은 몰려온 군인들을 보고 한편으로는 놀라면서 조정 역할을 수행하였다.

우선 거사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그 지도자로 흥선대원군나으리가 좋을 것이다.”

백낙관의 말에 군인들은 찬성하고 흥선대원군이 머물고 있던 운현궁으로 달려가 흥선대원군의 지시를 받게 되었다. 흥선대원군 역시 민씨 정권에게 밀려나 있는 형편이었기 때문에 무장을 한 폭동군들의 지지를 다시 정권을 잡는 데 이용하기 위해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권력을 되찾고자 나섰던 흥선대원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