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운 선생님/이재운선생의 우리말 이야기

[스크랩]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우리말 백과사전>을 만든 이유

윤의사 2016. 9. 23. 21:09

*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우리말 백과사전/근간/책이있는마을


나는 대학에서 소설 창작을 공부하고 대학원에서는 시론을 공부했다. 초급 과정에서는 김동리 선생으로부터 정확한 단어와 문장을 만드는 법을 반복해서 배웠다. 서정주 선생과 구상 선생도 시와 시어를 가르쳐주셨다.

그때 김동리 선생은 문법, 어휘, 문장을 특히 강조하셨다. 단어가 틀리면 꾸짖으시고, 문장이 틀리면 호통을 치시고, 분명하지 않거나 거짓말이거나 자기 생각을 글로 잘 표현하지 못해도 혼내셨다. 아마도 이것이 내가 뜻도 모르고 자주 쓰는 우리말 시리즈를 기획한 무의식적인 동기일 것이다.

그런데 서정주 선생은 다른 면에서 나의 귀감이 되었다. 선생은 단어 하나하나에 집중하여 그 뜻을 새기고, 어원과 배경을 찾는 습관을 나에게 가르쳐주셨다.

한문 공부는 하냐? 너 한문 공부해서 한문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 그래야 힘 있는 말을 갖게 된다.”

그리고 삼국유사, 삼국사기등을 공부하면서 신라의 시어를 무수히 길어 올린 말씀을 해주셨다. 좋은 글을 쓰려면 관찰자의 눈으로는 부족하다, 그 눈이 아무리 예리해도 안 된다, 공부를 하지 않는 시인 작가는 전쟁하러 나가면서 빈손으로 나가는 것과 같다는 말씀이셨다.

이를테면 선생의 시집 질마재신화같은 경우, 그 마을에 살았다고 해서 누구나 그렇게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인물과 사연, 시대를 읽어낼 어휘와 지식과 상식과 문화를 알지 못하면 거기서 백 년을 살아도 그런 시를, 그런 글을 쓸 수 없다는 말씀이셨다.

이후 나는 한문 고전 읽기에 나서서 원문을 읽어내는 능력이 생길 때까지 공부했다. 게다가 역사소설이란 장르를 잡고 나니 더더욱 고전을 읽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야말로 사고전서를 읽어내야만 했다.

 

고은 선생이 안성에 사실 때, 1998년에 출간한 내 소설 천년영웅 칭기즈 칸에 추천사를 써주신 인연으로 몇 번 찾아뵈었는데, 나는 시인께서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추천되면서도 결실을 보지 못하는 원인이 문법이 거칠고 뜻이 모호한 우리말 어휘에 있다고 판단했다.

1894년 갑오개혁 때 고종이 한글을 쓰라는 칙령을 내린 이후 비로소 한글과 우리말이 제대로 쓰이기 시작했으니 그 역사가 고작 100여 년을 조금 넘고, 현대적 의미의 우리말 사전을 만든 것은 고작 80여 년 전이다. 일제강점기인 1938년에 조선어사전이 간행되고,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 등을 거쳐 1947년에야 조선말큰사전이 나왔다. 그러니 해방 후에도 막연한 구전 우리말로 글을 쓰는 분들이 많았고, 1933년생인 고은 선생도 이러한 문학 언어 환경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처럼 우리말이 우리 문학 언어가 된 지 햇수로는 불과 100여 년을 넘는다. 그것도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번역하면서 줄기차게 써준 덕분에, 또 선각자 몇 분이 뼈를 깎는 노력으로 우리말이 문학 언어가 되었지, 안 그랬다면 어쩌면 나마저 아직 한문으로 소설을 쓰고 앉아 있을지 모른다.(그럼에도 초기의 거친 문법과 한자어가 너무 많이 들어간 성경번역본이 오늘날에는 도리어 국어발전의 장애가 되고 있다.)

짧은 역사를 가진 우리말로 한국 문학이 이만큼의 성과를 낸 것도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자와 일제강점기 일본어의 영향으로 문학 언어로서, 문자로서 정제되지 못한 게 사실이다.

 

나는 김동리 선생과 서정주 선생의 가르침대로 오늘날까지 내가 늘 쓰는 어휘와 문장을 다듬어왔다. 아름다운 표현이나 감동적인 문구보다 정확하고 바른 어휘와 글을 쓰는 게 먼저라는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려 애썼다.

어떤 총이든 실탄의 규격이 정확하고 품질이 좋아야 한다. 그래야 표적을 정확하게 쏘아 맞힐 수 있다. 어떤 작가는 우리말로 표현이 안 되니까 잘 안 쓰는 어려운 한자어를 갖다가 쓰기도 한다. 다 우리말 어휘가 풍부하지 못해서 그렇다고 여긴다. 그러나 지금도 많은 국어학자들이 우리말의 어원을 찾아내고, 우리말의 숨은 뜻을 다듬고 있다. 단어 하나 때문에 몇 년씩 고생하는 분도 있다. 내가 사전 작업을 20년째 놓지 못하는 이유도 그들과 다르지 않다.

나는 이런 마음으로 소설을 쓰는 일 말고도 우리말큰사전류가 해내지 못하는 작은 사전(辭典)’사전(事典)’을 펴내는 작업을 꾸준히 해왔다.

김동리 선생과 서정주 선생 생전에 뜻도 모르고 자주 쓰는 우리말 시리즈뜻도 모르고 자주 쓰는 우리말 1000가지, 뜻도 모르고 자주 쓰는 우리말 어원 500가지, 뜻도 모르고 자주 쓰는 우리말 1000가지, 뜻도 모르고 자주 쓰는 우리말 숙어 1000가지를 펴냈고, 그리고 이 책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우리말 백과사전이 그 뒤를 잇는 성과물이다. 앞으로도 궁중 언어, 백정 언어, 남사당 언어, 심마니 언어, 노름 언어, 해녀와 어부의 언어를 다룬 작은 사전을 더 내놓을 생각이다.

 

나는 우리말이 자리 잡지 못한 혼란기인 1958년에 태어나 유신 교육을 받고 자랐다. 또한 문학 언어가 되기에는 많이 부족한 우리말로 글을 쓰면서 오늘까지 살아왔다. 1982년 처음 소설을 펴낸 이래 우리말의 어휘가 뜻이 분명하지 않고 문법이 어지러워 늘 아쉬웠다.

국회에서 법을 만들고 지방의회에서 조례를 만들 때마다 어휘를 규정하는 조항이 반드시 들어간다. 법률이나 조례의 어휘란 누구든지 똑같은 의미로 말하고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오해가 없고 의미 전달이 정확해진다.

이런 뜻으로 보자면 우리말 자체가 그래야 한다. 그래서 생활 속에서는 상대적으로 다양하게 쓰이더라도, 법률이나 조례에서 절대적인 의미로 고정돼 있어야 한다. 그런데 막상 사전 작업을 하다 보니 뜻밖에도 제대로 쓰이지 못한 채 굴러다니는 말들을 많이 발견했다.

그래서 고전을 공부하고 소설을 쓰는 틈틈이 내게 필요한 사전을 만들어왔다. 소설가로서 올바르고 효율적인 무기를 갖고 싶었다. 앞으로 자라나는 세대들은 좋은 문학 언어로 글을 쓸 수 있는 세상이 오기를 바랐다.

이런 간절한 마음으로 만든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우리말 백과사전은 우리말 어휘를 더 바르고 정확하게 정의한 사전이다. 아울러 우리말 어휘에 생명과 힘을 부여한 성과물이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이 뜻도 모르고 자주 쓰는 우리말 시리즈와 함께 우리말을 가다듬고, 키우고, 늘리고, 또렷하게 자리 잡는 데 도움을 주리라고 생각한다.

 

이재운





출처 : 알탄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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