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옛길/영남길 13

성남 판교의 항일의병운동기념탑

대얼마 전 성남 판교에 항일의병운동 기념탑이 건립되었다. 늦었지만 다행스러운 일이다. 대한제국 말기의 우리나라는 외세의 침입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특히 일본과 러시아, 청나라의 틈바구니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애쓴 애국지사들이 수없이 많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의병운동이 일어난 것은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 외교권을 빼앗긴 을사늑약, 일본에 의해 강제로 군대가 해산된 정미7조약 등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운동은 을사늑약을 전후해 의병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알려지지 않은 의병장 중에는 성남 판교에도 있다. 바로 동천 남상목 선생이다. 일본이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면서 각종 전쟁 물품을 조달하기 위해 낙생면 하운산리의 산림을 마구잡이로 벌목하면서 낙생면과 언주면, 돌마면 등 3개 면민..

김대건 신부 生居地, 은이성지

김대건은 조선 유교 사회의 보수 세력에 의한 모진 박해를 무릅쓰고 천주교를 널리 알리는 데 온 몸을 바쳤다. 그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책임을 다한 참된 신앙인일 뿐만 아니라, 어둠의 장막을 뚫고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걸어간 개척자였다. 김대건의 어릴 때 이름은 재복, 세례명은 안드레아다. 김대건의 집안은 일찍부터 천주교를 받아들여 증조할아버지가 1814년에 순교하였다. 가족들은 박해를 피해 고향을 떠나 용인 양지면 은이성지로 숨어들었다. 훗날 그의 아버지도 기해박해로 순교하였다. 김대건은 이처럼 독실한 천주교 집안에서 자라면서 어릴 때부터 신부가 되려는 꿈을 키웠고, 깊은 신앙심으로 기꺼이 시련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였다. 순조 때 조선 교구가 만들어지고 신도들이 늘어났다. 그러면서 조선인 신부에 대..

실학을 체계화시킨 유형원

유형원의 묘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석천리 황석마을에 있는 정배산 동쪽에 자리잡고 있다. 유형원의 묘는 사망 직후에 만들어졌다가 1971년에 묘역을 다듬으면서 41M의 곡장을 만들었다. 봉분 앞으로 경계석이 정돈되어 있으며, 경계석의 중앙 부분에 혼유석, 상석, 향로석이 있다. 봉분의 오른쪽에 1768년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는 묘비가 있다. 비의 총높이는 160㎝, 비신 높이 136㎝, 폭 59㎝, 두께 23㎝이다. 봉분의 양쪽에는 금관조복을 착용하고 있는 문인석이 있으며, 신체의 사이즈가 맞지 않고 있다. 또한 성리학의 모순을 주장하는 유형원처럼 문인석의 얼굴도 웃음을 주고 있다. 유형원은 조선 효종 때의 실학자이다. 그는 정치, 경제, 군사 등 모든 분야에 걸쳐 학문의 실용성을 강조해 실학 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