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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히 지나치는 항일유적 표지석(2)

윤의사 2024. 8. 17. 15:19

1. 창덕궁 금호문 옆의 송학선 의사 의거 표지석

 

1926년 4월 26일, 순종황제가 세상을 떠난 소식을 들은 송학선 의사는 창덕궁의 망곡대열에 참가하였다.

송학선 의사는 빈소의 출입문이었던 창덕궁 금호문을 통해 일제의 주요 인물들이 다니는 것을 보고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 총독의 암살을 기획하였다. 

1926년 4월 28일 창덕궁 안으로 일본인 3명이 탄 차를 본 송학선 의사는 그들이 조문을 마치고 나오는 오후 1시 경,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몰려 차가 잠시 정차하였다.

송학선 의사는 이때를 노려 금호문에서 사이토 마코토 총독 일행이라고 생각해 의거를 행하였다.

송학선 의사의 의거로 국수회 지부장 다카야마 다카유키, 경성부 평의원 사토 토라지로가 사망하고 경성부 평의원 이케다 나가지로가 부상을 입혔다.

거사 후 송학선 의사는 차에서 내려 휘문고보 쪽으로 달리자 일본 기마 순사 후지와라토쿠히와 서대문경찰서의 순사 오필환이 뒤따라오자 이들에게 자상을 입혀 후에 부상이 악화돼 죽음을 맞게 하는 성과를 올렸으나, 휘문고보 정문 앞에서 20여 명의 일경에게 포위되어 체포되었다. 송학선 의사는 사이토를 죽인 것으로 알았지만, 사실을 알고 실망했다.

1926년 5월 6일 송학선 의사는 살인 및 상해죄로 경성지방법원에 기소되었다. 1926년 7월 23일 송학선 의사는 일본인 변호사 마츠모토가 사형만을 막으려 노력했지만, 경성지방법원에서 살인 및 살인미수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가족과 변호사의 설득으로 상고까지 진행하였지만 최종적으로 1927년 2월 4일 경성고등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었다.

송학선 의사는 상고심 판결을 담담히 사형선고를 받아들이며 태연한 태도를 유지하였다.

1927년 5월 19일 일제 사법당국은 서대문형무소에서 비밀리에 송학선 의사에 대해 교수형을 집행하면서 향년 30세에 순국하였다.

송학선 의사 의거 터

 

2. 민영환 선생 순절터

 

명성황후의 조카인 민영환은 금수저였다.

그에게는 어려움도, 장애물도 없었기에 안하무인일 정도였다.

오죽하면 동학농민운동을 일으킨 전봉준의 제거대상 3인 중 한 명이 바로 민영환이었을까?

하지만 새로 즉위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축하사절단으로 러시아를 비롯해

미국 등 우리나라 최초로 세계일주를 한 민영환은 생각을 바꾸었다.

오직 근대적 개혁을 통해야만 나라도 부강하고 국민들도 편해질 수 있다는 것을...

그래서 민씨 친척이나 주변 권력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독립협회를  도와주면서,

독립협회의 의회 설립 운동을 지지하고, 민중이 함께한 관민공동회에 참여하였다.

민중의 권리 신장을 도모하며, 대한제국을 자주 독립국으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이루려 했다.

하지만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으며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하자, 을사오적의 처벌과 조약 파기를 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하지만 일본 헌병에 체포돼, 감옥에 갇혔다가 석방된 민영환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 황실의 은혜에 보답하고

국민들을 깨우쳐 자유 독립을 회복하는 초석이 되기로 결심하면서 1905년 11월 30일 자결했다.

서울 공평유적박물관 부근에 있다.

 

3. 서울 종로구 관수동 143번지에 있는 신간회 본부 터

 

신간회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지식인들이 사상 이념의 대립을 뛰어넘어 단결하자는데 있다.

1920년대 초반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자가 많아지자 민족주의자들은 이들을 비판했다. 

이와 함께 일제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자에 대한 탄압으로 사회주의자들이 민족주의와 힘을

합쳐 새로운 길을 모색하게 된 것이다.

좌우 합작으로 만들어진 신간회는 불과 5개월에 전국 134개 지회를 설립하고 회원수는 

3739명에 이르렀고, 1929 11월의 광주학생운동 이후에는 그 수가 10만에 이르렀다. 

일제는 신간회의 확장에 창립대회 후 단 한 번도 전체 대회를 열지 못하게 하였다.

신간회는 내부분열로 발족한 지 5년 만에 해체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