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동쌤의 역사 속의 오늘은?

7월27일 오늘의 역사 주시경 선생

윤의사 2024. 7. 27. 18:37

대한제국, 일제 강점기의 국어 학자

한글을 통해 우리의 민족 정신을 굳건히 지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우리 말과 글을 과학적으로 연구할 수 있도록 체계를 세우는 한편, 일제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수많은 교육 기관을 뛰어다니며 한글을 보급하는 데 앞장섰다. 다른 이름은 상호, 호는 한힌셈이다. 정부에서는 그 공훈을 기려 1980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습니다.

 

주시경은 가난한 선비 집안에서 태어나 큰댁의 양자가 되어 서울로 올라왔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돈벌이를 하며 공부했던 주시경은 신학문에 대한 열의가 대단하여 야간에도 학교를 다닐 정도였다.

배재학당에 들어간 그는 마침 서재필의 눈에 띄어 <독립신문> 만드는 일을 했다. 그때 우리말 표기가 제각각인 것을 알고, 맞춤법을 통일하기 위한 연구에 힘썼다.

한편 독립협회가 주최하는 만민공동회에 참여하여 한글의 중요성을 알렸고, 직접 협성회를 만들어 <협성회보>를 통해 일본의 침략에 대해 알려 나갔다.

 

우리 말과 글의 과학적인 체계를 세우다

주시경이 국어 연구와 사전 편찬에 관한 글을 고종에게 올리자, 1907년에 학부(오늘날의 교육과학기술부) 안에 국문 연구소가 만들어졌다. 주시경은 어윤적, 이능화 등과 함께 국문 연구소의 연구위원이 되었고, 국문 연구소는 23차레에 걸쳐 토론회를 열면서 한글의 문법, 소리를 비롯한 여러 특성에 대한 연구를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연구를 정리하여 매우 훌륭한 보고서인 국문연구안을 나라에 올렸는데, 오늘날 맞춤법과 크게 다르지 않을 만큼 체계적이었다.

한편 주시경은 최초의 현대적인 국어 사전인 <말모이>를 펴내는 일을 맡고, 자신이 독자적으로 개척한 초기 국어 문법을 담은 <국어 문법>을 간행하였다. 또 순 우리말로 쓴 <말의 소리>에서 한글이 영어의 알파벳과 공통성이 있음을 설명하여 세계 최초로 구조언어학적 이론을 만들어 냈다. 그밖에도 <대한 국어문법>, <국어문전음악>, 한글 교과서인 <국문초학> 등을 남겨 과학적인 한글 연구의 토대를 닦았다. 훈민정음을 언문(諺文), 가갸글, 조선글처럼 여러 가지로 부르던 것을 한글이라고 고쳐 부르게 하였다.

 

한글을 널리 보급하여 민족 정신을 지키다

주시경은 1910년에 나라를 완전히 빼앗긴 뒤에는 한글을 다듬어 널리 보급하는 일에 더욱 힘을 쏟았다. 그래서 숙명여자고등학교, 협성학교, 이화학당 등 수많은 학교와 강습소에서 우리 말을 가르치는 한편, 보성학교 안에 일요 강습소를 설치하여 국어 학자들을 길러 냈다. 이렇듯 바쁘게 돌아다니는 주시경의 손에는 늘 등사판으로 만든 교재를 담은 큼직한 보다리가 들려 있어 주보따리라고 불렸다. 또한 언제나 한복 두루마기 차림이었는데 한복 속에 우리 겨레의 얼이 들어 있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주시경은 모든 국민에게 한글을 보급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전통 문화를 이어받아 발전시키는 지름길이라고 믿으며 열심히 뛰어 다녔고, 결국 과로로 쓰러져 1914년 7월 27일 서른여덟 살의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주시경 선생과 <말의 소리>(사진:독립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