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동쌤의 역사 속의 오늘은?

오늘은 의병장 최익현 태어남

윤의사 2023. 12. 5. 20:03

조선 후기의 유학자이자 의병장인 최익현은 조선 후기 유명한 유학자인 이항로의 제자이다.

대원군의 경복궁 복원 공사, 당백전 발행 등을 비판하여 귀양을 가기도 하였다.

이후 정부가 일본과 외교 관계를 맺으려 하자 이를 거세게 비판하였으며, 나중에 의병 운동을 이끌다가

쓰시마 섬에서 죽었다자는 찬겸, 호는 면암이다.

 

최익현은 1833년 12월 5일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당시 성리학의 대가인 이항로의 제자가 되어 공부하였다.

슬길에 오른 뒤에는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 비판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특히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흥선 대원군의 잘못을 조목조목 따져 흥선 대원군이 물러나게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후에도 왕비를 등에 업고 설치는 민씨 일파의 잘못을 밝히려다 미움을 받았다.

그래서 임금의 아버지를 비난했다는 죄를 뒤늦게 덮어쓰고 제주도로 귀양 갔다.

이처럼 최익현은 어떤 피해와 탄압을 당할지라도, 그릇된 일은 반드시 바로잡으려 했던 대쪽 같은 성품을 지닌 선비였다.

 

최익현은 귀양살이에서 돌아와, 외세를 막고 유교 질서를 지키는 데 힘을 쏟았다.

특히 그는 조선이 문호를 개방하면,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물건은 적은데 일본의 요구는 많아 침략으로 이어질 것이며,

서양과 일본의 물건 때문에 백성들이 사치스러워질 것이며, 천주교가 더욱 퍼져 우리의 아름다운 풍속을 해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나라에서는 계속해서 수차례 벼슬을 내렸지만 최익현은 받지 않았다. 그보다 그는 다시 귀양을 갈지라도 뜻을 굽히지

않고 수시로 상소를 올려, 잘못된 정치를 바로 잡고 일본을 멀리하자고 주장하였다.

 

1905년 강제로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최익현은 이 조약을 무효로 돌리고, 조약에 찬성했던 5명의 매국노를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백성들이 나라의 주권을 되찾는 데 온 힘을 기울이자는 글을 전국에 돌려 항일 정신에 불을 지폈다.

이듬해 최익현은 일흔네 살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전라북도 태인에서 임병찬과 손을 잡고 의병을 일으켰다.

이어 순창에서 4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일본군과 관군에 맞서 싸웠으나 패하였다.

최익현은 일본의 쓰시마 섬으로 잡혀가서도 당당한 태도로 일본 경찰을 꾸짖었으나, 풍토병에 걸려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런데 흔히 최익현이 쓰시마섬에서 일본 음식을 먹지않겠다며 단식을 하여 순국했다고 적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최익현은 쓰시마섬 경비대장이 실내에서는 갓을 쓸 수 없다며 강제로 갓을 벗기려 하자 김홍집내각이 내렸던

"단발령(斷髮令)에도 굴복하지 않았는데 왜놈 대장의 말대로 벗을 수는 없다"

며 왜놈들의 온갖 곤욕을 이겨내며 최익현과 임병찬 등은 단식을 시작하였다.

이에 이틀 뒤 경비대장이 실내에서 갓 쓰는 것을 허락하자 바로 단식을 중단하였다고 한다. 

그 뒤 면암은 1906년 12월 4일, 쓰시마섬에서 음식을 먹기만 하면 토하여 몸저 누웠다.

이 소식에 집에서 한의사까지 보냈어도 병세가 호전되지 못하다가 결국 이듬해 1월 1일 병사 순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