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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 피휘라니...

윤의사 2023. 2. 12. 16:20

“‘주애’들은 이름 바꿔라”…동명이인 개명 강요하는 北|동아일보 (donga.com)

 

“‘주애’들은 이름 바꿔라”…동명이인 개명 강요하는 北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딸 김주애가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잦아진 가운데, 북한이 ‘주애’라는 동명인들에게 개명을 강요하는 정황이 포착됐다. 자유아시아방송(R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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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역시 왕조국가이다.

북한의 정식국가명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

자유라는 말이 없어서일까?

21세기에 위와같은 기사가 뭔일일까?

피휘나 기휘는 한세기도 훨씬 전에 왕조국가에서나 볼슈 있었던 일.

 

우리나라에서는 오랜 옛날부터 임금의 이름에 쓴 글자는 일반 백성이 쓰지 않는 풍속이 있었다. 이를 어느 정도 철저히 지켰는지 고려시대에 있었던 일화를 보자.

당시 예천에 흔섬(昕暹)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고려 29대왕인 충목왕의 이름이 왕흔(王昕)이었다. 그러자 나라에서 흔섬에게 흔이라는 성 대신 권 씨 성을 쓰게 하였다. 아버지 흔승단(昕昇旦)이 안동 권 씨인 권백서(權佰諝)의 사위이므로 어머니의 성을 따라 권 씨로 고치게 한 것이다.

이렇게 왕이 생전에 쓰던 이름을 쓰지 않는다는 뜻의 단어로 국휘(國諱)’가 있다. 여기서 ()’자는 피한다는 뜻인데, 나중에는 임금이 살아 생전에 쓰던 이름 그 자체를 라 일컫게 되었다.

백성이 왕이나 제후의 이름자를 쓰기를 피하는 휘의 풍속은 중국이나 일본에도 있었는데, 그 기원은 중국의 진나라이다. 이 때는 죽은 이의 생전에 쓰던 이름자를 피하는 피휘(避諱)뿐만 아니라 생휘(生諱:살아 있는 동안에도 그 이름을 피하는 일)도 있어 진시황의 이름인 정()()’으로 대신 표기하기도 했다.

피휘의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대자(代字), 개자(改字), 결자(缺字), 결획(缺劃) 등이 그것이다.

대자는 글자를 음이 같은 다른 것으로 대신 부르는 것이며(), 개자는 아예 이름을 바꾸는 것이고, 결자는 이름자에서 해당되는 글자를 빼는 것이며, 결획이란 해당 이름자에서 획이나 부수를 빼어 대신 표기하는 것이다.

휘 때문에 관직이름이나 땅이름, 물건의 이름이 바뀌거나 없어진 일도 많다.

이 휘법이 우리나라에 언제 들어왔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삼국시대부터 사료가 나타난다. 삼국시대의 금석문이나 역사책을 보면 피휘하거나 결필한 것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신라 문무왕릉비에는 비를 세운 날짜가 감오일경진건비(甘五日景辰建碑)’라고 되어 있고, 도 신라 진성여왕 때 세운 숭복사(崇福寺) 비문에는 보력경오춘(寶曆景午春)’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 두 비문에 나오는 경진(景辰)’경오(景午)’는 당나라 고조의 아버지 이름인 병()의 음을 피하기 위하여 병진(丙辰), 병오(丙午)를 바꾼 것이다.

그리고 짐감선사탑비(眞鑑禪師塔碑)의 비문에 민()이나 민()으로 되어 있는 것은 원래 ()’자를 쓰는 것이 맞는다. 그런데 당태종의 이름인 세민(世民)’의 민자를 피하기 위해 대신 쓴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이전에는 왕의 휘를 피한 예를 찹아볼 수 없다. 그 때까지는 왕권이 강력하게 확립되지 못한 까닭인 듯 하다.

신라의 경우에는 임금을 표현하는 묘호와 휘와 자()의 구분이 불분명한 것으로 보아 휘의 개념도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고려 때의 금석문에는 왕의 이름을 피한 풍속이 금석문에 나와 있다. 봉암사(鳳岩寺) 정진대사원오탑비문(靜眞大師圓悟塔碑文)상령문호양반우승관(上領文虎兩班又僧官)’이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문호양반(文虎兩班)은 문무(文武) 양반을 가르키는 것으로, ()를 상징하는 ()’를 무()를 써야 할 자리에 쓴 것이다. 이는 고려 혜종(재위:943945)의 휘인 ()’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반 백성이 왕의 이름과 같은 글자를 쓴다는 것은 왕권에 대한 도전이며 권위에 대한 반발이었다. 이 때문에 왕의 이름자는 가능한 한 자주 쓰이지 않는 어려운 글자를 썼다. 그래야만 일반 백성들이 이름지을 때 불편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고려, 조선시대 임금들의 이름을 보면 도무지 무슨 글자인지 읽기조차 힘든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조선의 태조 이성계도 임금이 된 뒤에는 이름을 단()으로 고쳤으며, 선조의 경우 원래 이름은 균()이었으나 일반 백성의 이름자에 너무 많이 들어가는 글자였기 때문에 연()으로 바꾸었다.

기휘(忌諱)의 풍습은 세월이 갈수록 폭이 넓어져, 임금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이 자기 조상의 이름자를 피하는 풍습까지 생겨났다. 그래서 조상의 이름자가 든 벼슬자리에 취임하는 것을 거부하는 일도 있었다.

세종 때 유계문(柳季聞)이라는 선비가 있었다. 벼슬자리에 나아가 경기 관찰사로 배임받자 그는 펄쩍 뛰면서 못하겠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의 아버지 이름자인 유관(柳觀)의 관 자가 벼슬 이름인 관찰사(觀察使)의 관자와 같아서 아버지에게 누를 끼치는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아들이 이렇게 나오자 그의 아버지가 스스로 유관(柳寬)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런 뒤에야 유계문은 경기 관찰사에 부임했다고 한다.

오늘날의 관점으로는 코미디의 한 장면 같지만 조선시대는 엄격한 유교 사회였기 때문에 이런 일이 결코 예사롭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우리 선조들은 글을 읽을 때도 최소한 5대조 조상까지의 이름자가 글에 나오면 그 글자는 소리내어 읽지 않고 묵음(黙吟)으로 넘어갔다. 심한 경우에는 그 글자 대신에 에고하며 곡()을 대신하기도 했다고 한다.

공문서에도 조상의 이름이 나오면 그 자를 쓰지 않고 그 글자를 써야 할 자리에 라고 쓰는 것이 관례였다. 다른 사람이 보면 무슨 뜻인지 몰라도 자기 자신은 알 것이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고집 센 선비는 공문서에 자기 조상의 이름자가 하나라도 들어 있으면 아예 결재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기휘 풍속은 원시적인 주술(呪術) 사고(思考)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유교 이념으로 더욱 굳어졌다. 곧 원시인들은 그의 이름이 단지 기호가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좌우하는 힘을 지닌 것으로 여겨 이름을 저주하거나 훼손하면 생명에 직접적인 피해를 입는 것으로 알았는데, 이러한 원시적인 의식이 조선시대까지 이어진 것이다.